‘독도는 세계 어느 나라 해도상에서도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무인도다. (중략) 섬 주위의 수심이 얕은 관계로 군항(軍港)보다는 차라리 어항(漁港)에 적합하다. 한시라도 빨리 등대를 건설해 달라.’
1954년 7월 29일 동아일보 2면에는 ‘절해(絶海)의 섬 독도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독도 르포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의 반향은 컸고, 그해 광복절 등대가 처음으로 독도의 밤을 밝혔다. 이후 이 등대는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김 전 기자에 따르면 당시는 이승만 정권이 1952년 1월 평화선 선언(한국 연안의 50∼60마일 수역에 대한 한국 주권 확인)을 한 뒤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의 파고가 높던 때였다.
일본 시마네 현이 1953년 독도 어업허가권을 일본 어민에게 내준 뒤 이들의 독도 침범이 잇따랐다. 급기야 1954년 초 일본 참의원 의원인 쓰지 마사노부(십政信)는 자국 기자들과 함께 독도에 잠입해 암벽마다 페인트로 일장기를 그려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신문은 “한국의 함정은 어디에 있느냐”는 쓰지 의원의 망언을 제목으로 이를 대서특필했다.
김 전 기자는 “‘독도에 들어가는 데 막는 사람 하나 없더라’며 한국의 독도 경비를 비웃는 내용이었다”며 “의원과 일본 언론은 평화선 무효와 독도 영유권을 노렸다”고 회고했다.
발칵 뒤집힌 국회는 긴급 본회의를 소집해 독도에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결의했다. 김 전 기자는 7월 24일 출발한 조사단에 단독 동행했다.
김 전 기자는 “독도에 등대를 세우면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을뿐더러 세계적으로도 ‘우리 땅’인 것이 입증되지 않을까 상상하며 기사에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독도의 등대 문제는 국회로 비화됐다. 독도 조사단이었던 김상돈 의원은 르포 기사를 국회 본회의장에서 그대로 읽었다.
이후 ‘독도 등대 설치안’이 정부에 건의됐고 한 달도 안 돼 김 전 기자의 상상이 현실이 됐다. 이를 계기로 독도경비대가 상주해 일본인은 독도 땅을 더는 밟지 못하게 됐다. 김 전 기자는 반세기가 넘도록 일본이 독도에 대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데는 한국인 모두가 독도문제가 불거질 때만 반짝 관심을 갖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보름만 지나도 정부, 국민, 언론 모두 독도를 한동안 잊을 것”이라며 “의원들도 다투듯 독도를 방문해 영토 수호 의지를 과시하지만 이 모습이 TV에 나온다고 실효적 지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는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역화하려는 안타까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등대’와 같은 현실적인 대응책과 함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꾸준한 연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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