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장 고시원’이 고단한 서민들 삼켰다

  • 입력 2008년 7월 26일 02시 54분


25일 7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 용인시 김량장동 타워고시텔 화재 현장에서 경찰이 화재 원인 감식 작업을 하고 있다. 용인=김재명 기자
25일 7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 용인시 김량장동 타워고시텔 화재 현장에서 경찰이 화재 원인 감식 작업을 하고 있다. 용인=김재명 기자
용인 고시원 화재 7명 사망-11명 부상

미로 복도에 방 66개… 취침중 대피 늦어

건설노동 中동포 형제 생사 엇갈려 오열

등록금 벌이 나섰던 대학 휴학생도 참변

“빈방 두군데서 불길” 방화 가능성도 수사

경기 용인시의 한 고시원에서 불이 나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고시원은 미로식 복도 양쪽에 6.0m² 크기의 방 66개가 벌집처럼 자리 잡고 있어 인명 피해가 컸다. 희생자 대부분은 가족과 떨어진 채 건설현장이나 식당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서민들이었다.

불이 난 곳은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용인타워빌딩(지하 3층, 지상 10층) 9층의 ‘타워고시텔’.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김재명 기자

화재 발생 시간은 25일 오전 1시 25분경으로 투숙객 대부분이 잠을 자고 있었다. 불이 나자 고시원 관리인 고모(46) 씨가 소방서에 신고했고 출동한 소방관들에 의해 오전 2시 5분경 진화됐다.

그러나 고시원에서 잠을 자던 이영석(37) 씨 등 7명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유독가스에 질식해 숨졌다. 비상구로 사용하던 후문은 화재 당시 잠겨 있었다.

이철균(42) 씨 등 6명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 씨 등 2명은 중태다. 상처가 가벼운 나머지 5명은 치료를 받고 귀가했다.

불은 비어 있던 고시원 6호실에서 난 것으로 알려졌다. 거주자가 없는 8호실의 침대 일부도 불에 탔다.

경찰은 방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경기지방경찰청 이명균 강력계장은 “방화와 실화 가능성 모두 염두에 두고 수사 중”이라며 “건물 1층과 승강기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자료를 확보해 분석 중”이라고 말했다.

숨진 이영석 씨의 어머니 김모(63) 씨는 10년 만에 찾은 아들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자 넋을 잃었다.

이 씨는 10년 전 집을 나간 뒤 가족과 연락이 끊어졌다. 김 씨는 지난주 집으로 온 교통법규 위반 벌금 고지서를 보고 아들이 용인에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날 오전 서울 집에서 용인으로 출발하려다 뉴스를 보고 아들의 이름을 발견했다.

김 씨는 “헤어진 지 오래돼 형제들은 얼굴을 못 알아봤는데 귀 밑의 상처와 점을 보니까 영석이가 맞더라”며 오열했다.

사망자 이철수(44) 씨는 부상자 이철균 씨와 친형제 사이다. 중국동포인 이 형제는 2월경 방문취업차 입국해 함께 고시원에 머물며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이 형제는 불이 나자 손을 잡은 채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나 연기 속을 헤매다 잡았던 손을 놓쳤고 결국 생사의 운명이 엇갈렸다.

동생 철균 씨는 병실로 옮겨진 뒤 의식을 차리고 나서야 형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그는 “중국에 있는 형수와 가족들에게 아직 연락을 하지 못했다”며 “이 참사를 어떻게 전하란 말이냐”며 눈물을 흘렸다.

2개월 전부터 경기 성남시 판교신도시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이병철(38) 씨는 불과 1주일 전 고시원 방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이 씨는 출입구에서 2, 3m 떨어진 방에 머물다 “창문이 있는 방으로 가겠다”며 고시원 안쪽 27호실로 옮겼다. 가족들은 이 씨가 방을 바꾸지 않았으면 살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정찬영(26) 씨는 2006년 말 군복무를 마친 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용인의 한 물류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머니 임모(50) 씨가 “등록금을 내줄 테니 가을에 복학하라”고 했지만 정 씨는 “마지막 학기 치 등록금까지 벌어놓겠다”며 계속 일하다가 화를 당했다.

화재 당시 경보 소리에 잠을 깬 여대생 조윤진(20) 씨는 연기 때문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다른 여성의 목숨을 구했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을 막고 방에서 나온 조 씨는 출입구에 쓰러진 한 20대 여성을 업고 승강기를 이용해 가까스로 탈출했다.

신발도 못 챙기고 나와 발에 2도 화상을 입은 조 씨는 “한 명이라도 ‘불이야’라고 외쳤더라면 허망하게 숨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용인=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사망자=강정혜(51·여) 권순환(26) 김병근(47) 이병철 이영석 이철수 정찬영

소 잃고 외양간 안 고치더니…

2년전 잠실 참변 겪고도 스프링클러 의무화 미적

‘학원이냐 주거시설이냐’ 고시원 관리부서도 애매▼

고시텔을 관리 감독하는 정부 부처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스프링클러 설치 규정도 허술해 화재 가능성을 높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06년 7월 8명이 사망한 서울 송파구 잠실동 N고시텔 화재에 이어 이번 용인시 T고시텔 화재에 이르기까지 고시텔은 특유의 밀집된 내부구조로 불이 났을 때 큰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2006년 제정된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고시텔은 노래방, 단란주점, 휴게음식점 등 13개 업소와 함께 다중이용업소로 규정돼 있다.

이 법에는 다중이용업소가 지하에 들어설 때에만 간이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10층짜리 건물의 9층에 있던 용인시 T고시텔은 간이 스프링클러 설치의무가 애초부터 없었다.

일반 스프링클러도 현행 소방법에 따르면 연면적 5000m², 11층 이상, 복합건축물이어야만 설치 의무가 부과돼 용인 T고시텔은 이마저도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경기도 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전체 고시텔에 대해 간이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를 부과하는 방향으로 소방방재청에 이미 건의해 놓은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형 참사가 일어난 2년 전 미리 소방법을 개정했다면 이번 화재를 막을 수도 있었다.

같은 다중이용업소에 속한 노래방과 음식점이 평상시 각각 경찰과 지자체의 관리를 받는 것과 달리 고시텔을 관리하는 행정부서가 없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는 고시텔의 성격 자체가 애매한 것과 관련이 있다. 경기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앞에 붙은 ‘고시’라는 명칭 때문에 고시텔이 학원시설인지 사실상 주거시설인지에 대해 교육과학부와 보건복지부 간에 의견이 엇갈려 지금껏 제대로 된 관리부서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업주가 돈을 벌 욕심으로 중간에 칸막이를 늘려도 이를 제지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실정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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