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 성감별 금지는 헌법불합치’ 기대 - 우려 교차

  • 입력 2008년 8월 1일 03시 04분


“산모 알권리 회복… 의사도 부담 덜어”

“성별 알면 ‘낙태의 유혹’ 강해질수도”

헌법재판소 전원재판소가 31일 태아 성(性) 감별 고지를 금지한 의료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시민들과 의료계는 대체로 “헌재가 시대 변화에 따른 적절한 결정을 내린 것 같다”며 문제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한의사협회는 헌재 결정 직후 “태아의 성별은 임신부와 그 가족에게 상당히 중요하고 소중한 정보로서 산모의 알권리 실현 차원에서 태아의 성별 고지 허용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종교계와 일부 시민단체는 낙태와 생명 경시 풍조를 조장할 수 있다며 헌재의 결정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 시대에 뒤처진 태아 성 감별 금지법

시민들은 지금도 많은 병원에서 태아의 성을 알려주고 있다며 이미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계속 법으로 금지하려고 하는 게 이상한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다음 달 출산을 앞둔 이나리경(27) 씨는 “대학병원 같은 큰 병원에서는 알려주지 않지만 작은 병원에선 대부분 알려준다”며 “내가 다니는 대학병원에서 만난 임신부 중에는 동네 산부인과를 별도로 찾아가 아이의 성별을 알아본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임신 7개월째인 치과의사 신모(32) 씨는 지난달 다니는 산부인과 의사를 통해 아기의 성별을 알았다. 신 씨는 “지금도 임신 초에는 몰라도 5개월 정도 되면 의사가 초음파 검사 등을 할 때 ‘엄마 닮았네요’(딸이라는 뜻)라는 식으로 알려준다”며 “‘태아 성 감별은 무조건 안 된다’는 논리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여아 태아 낙태의 한 원인으로 지적받아 온 ‘남아 선호 사상’이 많이 약해졌다는 점도 이번 헌재 판결을 반기는 배경이 되고 있다. 임신 5개월째인 회사원 김모(28) 씨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 ‘한두 명만 낳아 귀하게 잘 기르자’는 것이기 때문에 성별이 희망했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낙태를 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낙태 부작용 방지할 후속 조치 필요

이번 헌재의 결정에 따라 앞으로 산부인과에서는 임신부가 아기의 성별을 물어보고 병원 측이 아이의 성별을 알려주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내가 임신 중인 은행원 백모(30) 씨는 “태어날 아기의 옷 가구 장난감 이름 등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아기의 성별을 부모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석일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총무이사는 “지금까지는 태아 성 감별을 금지하는 현행법 때문에 의사들이 잠재적인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면서 “부모의 알권리 충족 차원에서 이번 결정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이번 결정이 낙태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성 감별을 금지하는 현행법이 내년 말까지는 유지될 뿐만 아니라 정부가 출산장려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도 낙태가 크게 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관련 의료법 조항이 개정될 때까지 이번 결정이 낙태 허용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생기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재환 대한산부인과 학회 법제위원회 간사는 “이번 일이 태아 성 감별이 자유로워졌다거나 낙태의 범위가 넓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후속 조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곽명섭 보건복지가족부 의료제도과 사무관은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면서 부모의 알권리도 보장하는 법이 마련되도록 하겠다”면서 “올해 안에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해 내년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종교계, 낙태 증가 우려

한편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낙태가 더욱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박상은 전 생명윤리학회 부회장은 “현재 낙태를 금지하고 있는 모자보건법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면서 “원하지 않는 성별일 경우 낙태시키지 않으면 우울증이 심해질 수 있다는 식의 이유로 낙태를 하는 사례가 많다”고 우려했다.

2005년 복지부가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및 종합대책 수립’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낙태 건수는 34만2000건이며 이 중에서 0.7%에 해당하는 2500건이 성 감별에 의한 낙태로 추정된다. 낙태 반대 단체들은 태아 성별 고지가 허용되면 성 감별에 의한 낙태율이 2∼3%대까지 높아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 박정우 신부는 “(헌재는) ‘임신 말기를 언제로 정하느냐는 문제가 남아있고 또 그 시기에 태아의 성을 알려줄 경우 낙태가 이뤄지겠느냐’고 하는데 법이 완화되면 의식도 완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박 신부는 “남아 선호 때문에 불법인 상황에서도 편법으로 태아 성을 알려주는 일이 많았는데 이번 판결로 그런 위험성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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