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은 도시락… 숙박은 찜질방… ‘살벌’ 물가 ‘짠물’ 휴가

해수욕장 텐트 치고 알뜰피서 지난달 28일 피서객들로 붐비는 강원도 속초해수욕장. 휴가철을 맞아 국내 유명 해수욕장에는 해외여행을 포기한 사람들이 몰리고 있지만 상당수가 ‘고유가 고물가’ 시대를 맞아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는 ‘짠돌이’ 피서객들이다. 속초=정기선 기자

피서객들 해외여행비 오르자 국내로 U턴

동-남해안 해수욕장 인파 10%이상 증가

《지난달 28일 강원도 경포해수욕장. 주중인데도 백사장은 피서객과 파라솔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고유가 고물가’ 시대를 맞아 국내로 발길을 돌린 알뜰 피서객들이 몰린 것이다. ‘쌀만 주시면 밥을 해드립니다. 김치+된장국은 공짜.’ 오가는 피서객 뒤로 이런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 모텔이 돈을 아끼려 손수 밥을 지어 먹는 ‘짠돌이 손님’들을 잡기 위해 내건 것이다. 같은 날 속초해수욕장 입구에서 만난 아이스크림 가판 상인은 “많이 오면 뭐 합니까. 돈을 안 쓰는데…”라며 고개를 숙였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남해안의 해운대, 동해안의 속초와 경포대, 제주도 등 국내 유명 해수욕장에 해외여행을 포기한 ‘U턴 피서객’들이 몰리고 있다. 하지만 현지 상인들의 표정은 밝지 않다. 허리띠를 졸라맨 서민들이 휴가지에서도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호텔-펜션은 예약 꽉 차

지난달 27일 부산 해운대해수욕장 주변 호텔에서 만난 회사원 유석훈(26) 씨는 “원래 동남아 여행을 계획했다가 포기하고 부산으로 왔다”고 말했다.

고유가로 항공권 값이 올라 2인 기준, 3박 4일 동남아 여행을 떠나려면 200만 원 이상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 씨는 “여기선 호텔에 묵어도 100만 원이 채 안 든다”고 말했다.

국토해양부가 산출한 올해 한국의 가구당 예상 휴가비는 해외여행이 지난해보다 61만 원 늘어난 평균 432만 원, 국내여행은 7만 원 늘어난 59만 원이었다.

이처럼 해외여행비가 크게 오르자 국내 유명 해수욕장 주변 호텔, 펜션들은 휴가지를 국내로 바꾼 고객들로 예약이 꽉 찼다.

부산 조선호텔은 7월 객실 점유율이 주중 70%, 주말에는 90%를 넘었다.

제주도에도 피서객들이 몰리고 있다. 7월 들어 30일까지 제주를 찾은 관광객은 46만7000여 명.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만7000명 늘어난 것이다. 항공사들은 특별기를 투입해 제주행 피서객을 실어 나르고 있다.

동해안과 남해안 해수욕장도 작년보다 피서객이 10% 이상 증가했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7월 중 해외여행 고객은 지난해의 84% 수준으로 줄었지만 국내여행 고객은 48%나 늘었다”고 말했다.

○해수욕장 근처 대형마트 북적

해운대 백사장을 찾은 남윤성(27) 씨의 가방 속에는 통닭, 햄버거, 빵, 수박, 음료수 등이 가득했다. 남 씨는 “출발하기 전에 할인점, 치킨집 등에 들러 사왔다”면서 “주차비와 파라솔 빌리는 비용 외에는 돈 쓸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주변 상인들은 “해수욕장 주변 편의점에서 컵라면,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도시락을 싸와 백사장 파라솔에서 가족끼리 먹는 피서객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속초해수욕장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한 대형 마트의 식품 코너는 이른 오전에도 피서객들로 북적였다. 이 매장의 올해 7월 매출은 지난해보다 12% 늘었다.

숙박비를 아끼려고 해수욕장 주변 찜질방을 이용하는 피서객도 적지 않다. 해운대 S모텔 사장 김인국(50) 씨는 “전화로 방값을 묻기만 하고 예약은 하지 않는 고객이 부쩍 늘었다”며 “해운대를 찾은 피서객의 절반쯤은 당일치기이거나 찜질방, 텐트에서 자는 것 같다”고 푸념했다.

경남 마산시에 사는 장모(48·자영업) 씨는 아내, 두 자녀와 함께 지난달 29일 제주를 찾았다. 항공요금을 줄이려고 전남 여수에서 배를 탔고, 차를 실어와 렌터카 비용 부담도 덜었다. 장 씨는 “숙박은 저렴한 민박으로 해결했다”고 말했다.

○횟집은 파리 날리고…가판도 썰렁

‘짠물 피서객’이 늘면서 현지 상인들은 울상이다.

속초해수욕장 입구에서 농구게임 가판대를 운영하는 이모(41) 씨는 투자비도 건지지 못할까 걱정이다. 이 씨는 “국내 해수욕장에 손님들이 몰린다고 해서 1360만 원을 들여 장사를 시작했는데 2주간 100만 원밖에 못 벌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김모(41) 씨가 운영하는 횟집의 테이블 12개는 점심시간인데도 모두 비어 있었다. 김 씨는 “가격표만 보고 돌아서는 손님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기름 유출 사고를 겪은 충남 서해안 지역 해수욕장 주변 상인들의 사정은 더 어렵다. 29일까지 한 달 동안 충남 태안 지역을 찾은 피서객은 53만6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50만9000명)의 15% 수준.

지난달 30일 태안군 만리포 해수욕장에서는 ‘해수욕장 영화상영제’, ‘자원봉사 환경캠프’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지만 피서객보다 행사 관계자와 주민이 더 많아 보였다.

이곳에서 정은숙 씨가 운영하는 숙박업소는 예년 이맘때면 방이 모두 차서 손님을 돌려보내던 곳.

하지만 올여름에는 방 30개 중 절반 이상이 비어 있다. 정 씨는 “기름 유출 사고로 힘들었는데 이제 경기까지 나빠져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산·강릉·태안=정기선 기자 ksch@donga.com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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