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명중 2명 집전화 보유서 ‘국민 90% 휴대전화’ 시대로
‘한 방울이라도 통 속에!’
젊은 사람이나 여성들은 잘 모르는 일이다. 30년 전 학교나 예비군 훈련장, 버스터미널의 남자 화장실에는 어김없이 이런 안내문과 함께 오줌을 수집하는 흰색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애국(愛國)한다는 마음으로 한 방울의 오줌이라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줌에서 추출하는 우로키나아제는 뇌중풍(뇌졸중) 치료제를 만드는 주원료로 사용된다. 마땅히 수출할 것이 없던 한국에선 이 원료를 1kg에 2000달러가 넘는 고가에 수출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60년간 한국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제와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고 새로운 문화현상과 상품, 직업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통계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경험한 사회변화상을 짚어 본다.
▽환경미화원과 엿장수가 수출 1등 공신=1960년대의 주요 수출품은 오징어, 돼지털, 무연탄, 흑연 등이었다. 다람쥐와 갯지렁이, 뱀과 메뚜기도 수출했다. 환경미화원은 독일의 제약회사로 수출하는 은행잎을 길바닥에서 긁어모았고, 강원도의 자작나무로 만든 고급 이쑤시개도 외화벌이의 ‘효자’였다.
정부가 주도한 공업화·수출중심 경제정책으로 1970년대 수출품에선 경공업 제품이 광물과 수산물을 밀어냈다.
주요 수출품 중 하나는 가발이었다. 엿장수가 리어카를 끌고 전국을 누비며 모아온 머리카락이 가발의 재료가 됐고, 남편 술값과 부모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판 여인이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섬유는 최대 수출품목으로 떠올랐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면서 1980년대에는 철강판과 선박, 반도체가 주력 수출품이 됐다. 중동 건설 붐으로 건설업이 가져오는 외화도 많았다. ▽광복 직후 최고 직업은 타이피스트=광복 직후 미군정이 들어섰던 3년간 최고의 직업은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였다. 교사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직업이었다.
1960년대에는 전차 운전사, 전화교환원, 라디오 조립원 등이 유망 직종으로 떠올랐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고향을 떠난 처녀들은 여공이나 버스 안내양으로 도시의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서울에 식모살이 온 것이 잘못인가요? 버스 차장이 된 게 잘못인가요? 술집에서 일한 게 잘못인가요?” 1975년 개봉한 ‘영자의 전성시대’에 등장한 영자의 넋두리는 가난한 서민의 딸들이 겪어야 했던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에는 은행원과 종합상사 직원, 해외여행이 자유로운 항공승무원이 유망 직업이 됐고, 1980년대부터 펀드매니저, 외환딜러 등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울에만 7000여 개에 달했던 주산학원은 모두 속셈학원이나 보습학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컴퓨터게임에 빠져 부모 속을 썩이던 아이들의 일부는 프로게이머가 되기도 했다.
▽전화기 값이 1년 치 연봉?=1978년 전화 한 대는 260만 원으로 웬만한 봉급쟁이의 1년치 연봉과 맞먹었다. 전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부가 1970년 9월 1일 이전에 가입한 이른바 ‘백색전화’ 45만7000대에 한해서만 매매를 허용했기 때문. 새로 전화를 개설하기 위해 대기한 사람들은 60만 명을 넘었다.
1955년 전화 가입자는 3만9000명으로 장차관이나 검찰 간부, 국회의원 정도가 아니면 집에서 전화를 사용하기란 불가능했다. 무섭게 치솟은 전화 가격은 1978년 전자식 교환기를 들여오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1966년 설치된 공중전화는 20여 년간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1982년 등장한 ‘삐삐’도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88년 등장한 휴대전화 때문에 자취를 감췄다.
1949년에는 1000명 중 2명만 일반전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난해는 10명 중 9명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1998년에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초고속인터넷은 4년 만에 가입자 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섰고, 지난해는 1471만 명이 가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에 100가구당 1대에 불과했던 승용차는 지난해 94대로 늘어났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