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되지 않은 ‘옛날’ 광화문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붉은 악마’였다. 그 집단의 위대함은, 빨갱이적(?)이란 불온한 이미지를 가진 붉은색을 열정의 상징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면서 소박하게 웃곤 했었다. 더불어 ‘악마’라는 살벌한 용어조차도 귀엽거나 혹은 살아 있는 이미지로 바꾸어버린 그 힘 앞에서 감히 ‘민중이란, 민중의 힘이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 하나의 생각 - 민중, 그 일그러진 모습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두고 싶은 것은 그 무효표 2표의 내역이다. 한 표는 틀림없이 석대 자신의 것이었고 다른 한 표는 바로 내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곧 여러 혁명에서 보이는 반동(反動)과 동질로 볼 수는 없는 것이 이미 나는 무너져 내린 석대의 질서에 연연해하거나, 그 힘에 향수를 품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미 담임선생님이 은연중에 불 지핀 그 혁명의 열기가 내게도 서서히 번져와, 나도 새로 건설될 우리 반에 다른 아이들 못지않은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 우리 반을 이끌 지도자를 선택해야 될 순간이 되자 나는 갑자기 난감해졌다. 공부에서건 싸움에서건 또 다른 재능에서건 남보다 나은 아이치고 석대가 받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대리 시험으로 석대가 그전 담임선생님의 믿음과 총애를 훔치는 걸 돕거나 석대의 보이지 않는 손발이 되어 그의 불의(不義)한 질서가 가차 없이 위압하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내가 혼자서 그렇게 힘겹게 석대에게 저항하고 있을 때 가장 나를 괴롭게 한 것도 그들이었고, 갑작스런 반전으로 내가 석대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되었을 때 가장 많이 부러워하거나 시기한 것도 그들이었다. [고등학교 국어(상),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가 만든 질서가 ‘담임’에 의해서 깨지는 순간에, ‘엄석대’에게 가장 큰 저항을 시도했다가 훼절한 대가로 달콤한 2인자의 지위를 누린 ‘나’가 갖는 생각이다. ‘엄석대’라는 ‘부정의(不正義)’를 지탱해주었던 것은 결국 반 학생 전체라는 것이다.
작가 이문열이 생각하는 민중이란 권력 앞에 무력하게 굴복하고, 권력이 나누어주는 작은 시혜에 감사하고, 그 권력이 약해지면 새로운 권력 앞으로 줄서는 몰주체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집단인 것이다.
이런 사고는 모든 사회 부조리의 원인을 그것을 가능케 하는 민중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데에 위험성이 있다. “우리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가고 있다. 왜? 국민들이 문제다. 우리 사회가 점점 부도덕해지고 있다. 왜? 국민들이 문제가 있으니까. 똑바로 해, 말 잘 들어야 해. 안 그러면 우리 다시 망해.” 이런 식의 웃기는 훈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 겁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내가 가졌다 왜. 정말 너 이 따위 장난만 하기냐?” 종하와 은수가 얼굴을 마주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낄낄 웃어댔다. “그게 니 깔치니?” “구경했으면 고맙다구 그럴 게지, 이 새끼가.” 나도 지지 않고 말했다. “너희들 사과 안하면 그냥 안 둔다.” 그에게로 가서 종이조각을 내밀어 주었다. “사과해, 너는 선생님을 욕보인 나쁜 놈이다.” “그래 병아리 선생님은 좋은 분이야” 하고 석환이가 잇달아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걸 네 손으로 찢어버려.” “이 새끼가. 맞아볼래?” 종하가 내 멱살을 잡아 앞뒤로 흔들다가 바닥에 쓰러뜨렸다. 은수와 영래가 “밟아버려, 밟아”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아이들이 뒤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제각기 떠들었다. “너희들이 잘못이다.” “우리는 병아리 선생님을 좋아한다.” “그분은 훌륭한 사람이야.” 기가 죽어지내던 장판석이도 종하를 내게서 떼어 밀치면서 말했다. (중략) “너희들 반장에게 이러기냐?” “너는 반장 자격이 없어.” “그만둬라.” 나는 종하에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사과 안 하면 몰매를 놓아서 쫓아내라.” 종하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듯이 영래를 바라보자 종하가 아주 비굴하게 들릴까 말까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다.”[고등학교 문학, 황석영 ‘아우를 위하여’]」
○ 다른 생각 - 민중, 살아있는 힘!
주인공인 ‘나’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반장 ‘영래’에게 온 힘을 다해 맞서고 있다. 그 힘은 학생들 전체의 힘으로 모아지고, 결국 ‘영래’를 굴복시키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민중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이다. 자, 오늘날 우리는 민중에 대해서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민중이라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아우를 위하여’ 등에 관한 더 많은 읽기자료와 해설은 이지논술 홈페이지(www.easynonsul.com)에 있습니다.
이은숙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