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오아시스
서울 송파구의 한 중학교 보건실엔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전교생 1100여 명 가운데 하루 평균 60∼70명이 들락거린다. 약 처방이나 응급처치가 필요한 학생은 25∼30명 정도다.
월요일에는 환자가 30%쯤 늘어난다. 주말 내내 신나게 뛰어 놀아서 근육통을 호소하는 학생도 있지만 대부분 여러 학원을 오가며 주말에 더 바쁘게 공부하는 아이들이다.
학원 시간에 쫓겨 식사 시간을 놓치거나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 생활 리듬이 엉망이 되는 학생이 의외로 많다. 이러다보니 복통 또는 두통에 심한 피로증세까지 동반되는 ‘월요병’을 앓게 된 것. 학교, 학원, 가정 그 어디에서도 진정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보건실은 학업 피로를 풀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보건실을 도피처로 이용하려는 학생도 있다. 이 학교 보건교사 유모(39·여) 씨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학생의 얼굴만 봐도 꾀병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다.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는 학생들이 “좀 쉬고 싶다”며 찾아오기도 하고, 그저 공부하기가 싫어 보건실을 찾는 학생도 있다.
18년 경력인 유 교사가 이런 속내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꾀병을 앓는 학생을 그냥 교실로 돌려보내지는 않는다. 일단 보건실을 찾는 학생은 약이든, 선생님의 관심이든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다.
아무런 약효가 없는 사탕 하나를 건네줘도 학생들은 정서적 위안을 받기도 한다. 유 교사는 ‘가짜 환자’일지라도 학생의 이름을 불러주며 친구처럼 짧은 대화를 나눈다. 자기억제력이나 참을성이 부족한 학생의 경우 심리적 안정을 주어야 수업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보건실 상습 이용자는 ‘애교’에 속한다. 보건실을 도피 공간으로 삼는 학교 부적응아는 심각한 경우다. 이런 때는 보건실에 별도로 마련된 상담실로 학생을 데리고 가서 대화를 나눈다. 담임교사와 달리 자신의 가정환경, 성적, 성격의 장단점 등을 전혀 모르는 보건 교사는 선입견 없이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봐 줄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있기 때문에 의외로 진솔한 대화가 가능하다.
올해 초 매일 보건실에 등교하다시피 하던 K 군이 있었다. 이 학생은 “학교가 재미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K 군의 진짜 문제는 친구관계에 있었다. K 군은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와 다른 학교에 배정되자 학교에 다니기 싫다고 부모에게 말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는 아들의 이런 ‘투정’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K 군은 학기 초 친구 사귀기에 실패했다. 학교생활이 점차 견딜 수 없이 싫어졌고, 보건실에서 시간 때우기 전략으로 위안을 삼았다.
유 교사는 K 군이 올 때마다 “어제 개콘(TV 프로그램 ‘개그콘서트’)봤냐? 선생님도 오늘 쩐다(짜증이 날 때 학생들의 쓰는 은어)”고 말하거나 “이거 선생님이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너도 볼래?”라며 친근하게 대했다. 쉬고 싶은 만큼 쉬고 돌아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 교사는 K 군의 상황을 담임교사에게 귀띔했다. 담임교사는 K 군의 짝을 바꿔주고 모둠활동을 통해 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K 군은 요즘도 가끔 보건실을 찾는다. 그 이유는 다르다. 유 교사가 보고 싶어서다. K 군은 이제 “학교 다니는 게 재미있어 졌다”고 말할 만큼 생기가 넘친다.
이혜진 기자 leehj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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