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추상에 살을 붙여 깎고 다듬어
아름답고 빛나는 형상으로 우리 눈앞에…
《고대 그리스에는 피디아스라는 거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그의 작품을 단 한 차례라도 본 사람은 평생 동안 불행해질 수 없다는 이야기가 떠돌곤 했지요. 작품을 그저 쳐다보기만 해도 영혼이 행복으로 충만해지고 삶이 끝나는 날까지 감동이 생생하게 지속되다니, 도대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네요. 그건 바로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 모셔진 제우스 신상이었어요. 사람들은 피디아스가 아름다운 기품과 경건한 위엄을 갖춘 제우스의 모습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의아해했어요. 실제로 제우스의 모습을 보지도 않고 순전히 지어내서 신상을 제작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데에도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도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예술의 영혼이 진정 자유로운 것은 상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궁리와 추측을 거듭한 뒤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피디아스는 날개 달린 ‘판타시아’의 손을 잡고 올림포스의 황금빛 하늘로 날아 올라가 제우스를 알현하고 공방에 돌아와서 신상을 만든 것이라고.
여기서 판타시아는 ‘상상’ 또는 ‘상상력’이라고 옮길 수 있어요. 거장 피디아스가 상상의 힘으로 궁극의 아름다움을 구현한 제우스 신상은 안타깝게도 서기 522년과 551년의 대지진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려서 돌무더기로 변하고 맙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상상의 힘을 빌려서 옛 거장의 걸작을 떠올려봅니다.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데에도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도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상상은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별자리 너머, 역사와 신화의 현장을 가리지 않고 단숨에 날아가는 요술 날개를 어깨에 달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술의 영혼이 진정 자유로운 것은 다름 아닌 상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첫째 작품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입니다(사진 1).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굴되었다고 해서 ‘사모트라케의 니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상상, 곧 판타시아처럼 니케도 두 날개를 달고 있네요. 고대 도기 그림이나 등잔부조를 관찰하면 북풍이나 서풍 같은 바람의 신들이나 에로스 같은 사랑의 신도 날개를 달고 있어요. 고대 그리스의 조형 예술가들은 재빠르고 날랜 움직임의 속성을 날짐승의 날개를 통해서 대신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네요.
그러나 ‘승리’를 날개 달린 여신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입니다. 승리뿐 아니라 대지, 창공, 바다, 풍요, 전쟁 같은 추상 개념들도 모두 인간의 모습을 닮은 신의 모습으로 재현하곤 했지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개념들을 조형을 통해 살붙임을 해서 우리들 눈앞에 드러내 보이다니, 상상이 가진 능력은 놀랍기만 합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시간의 날카로운 발톱에 할퀴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1863년 프랑스 영사 샹푸아소가 100개가 넘는 토막들로 흩어진 돌덩어리들을 발굴해 모아 온 것을 지금의 형태로 복원한 것입니다. 여신의 두 팔과 머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더라면 니케 여신의 자태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그러나 상상하는 힘이 있다면 온전한 니케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니케는 아마도 떨어진 두 팔로 기다란 트럼펫과 승리의 꽃 관을 들고 있었을 테지요. 니케는 승리의 전령입니다. 전쟁을 치르는 병사들에게 승전의 소식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요? 우리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짓는 니케 여신의 표정을 상상해 봅니다.
니케의 신상은 애당초 분수대 조형물이었다고 합니다. 지중해의 해상권을 거머쥐기 위해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3세가 사모트라케에 진격했을 때 로도스의 함대가 이들의 침공을 물리친 시데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기념물이었지요.
로도스의 시민들은 사모트라케 섬의 신전 터 한쪽 귀퉁이에 돌을 깎아서 석축을 세우고 그 한복판에 뱃머리에 올라선 니케 여신상을 올린 다음 물을 채워 넣었다고 해요. 산비탈을 타고 흘러내린 계곡수가 분수대를 채우면 뱃머리에 올라선 니케 여신의 모습과 짙푸른 산 그림자가 분수대 수면에 어른거렸을 테지요. 니케 여신의 옷자락에서는 지금도 퍼런 지중해의 바닷바람이 스칩니다. 짓궂은 바닷바람은 여신의 두 날개를 간질이고 옷깃을 잡아채며 질투를 부립니다. 바람은 니케 여신의 도드라진 젖가슴과 둥그런 아랫배, 그리고 오목한 배꼽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조각가의 끌에서는 바람소리가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나옵니다.
두 번째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입니다(사진 2). 두 팔이 뒤로 묶인 젊은 청년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반항하는 노예’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만, 원래는 어떤 예술의 가치를 상징했다고 합니다. 조각가가 미완성인 상태로 손을 떼기는 했지만, 가령 그의 오른발 아래 있는 뭉툭한 돌이 기둥머리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면 이 청년의 이름은 ‘건축’이 됩니다.
이처럼 건축, 회화, 조각도 승리의 여신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의인화될 수 있습니다. 많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처럼 미켈란젤로도 상상의 개념에 살붙임을 하는 방식을 고대의 전통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러면 건축은 웬일로 이렇게 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걸까요? 미켈란젤로는 ‘건축’이 아름다운 형상을 얻기 위해서 차갑고 무질서한 재료와 씨름하는 과정을 근육질의 대리석으로 표현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형태의 질서와 재료의 무질서가 싸우는 광경을 보여주는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