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문학숲 논술꽃]시시포스는 부조리에서 뭘 깨달았나

  • 입력 2008년 9월 22일 02시 56분


‘부조리’의 사전적 의미는 ‘도리에 어긋나거나 이치에 맞지 아니함’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바람이나 기대가 현실과 어긋난 상황’을 뜻하기도 한다.

현대인은 종종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주어진 삶에서 벗어나길 갈망하지만, 매일 주어진 그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마치 신화 속의 시시포스가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언덕 위로 돌을 굴려 올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부조리다.

『신들은 시시포스에게 바위를 쉬지 않고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내렸다.

산꼭대기에 올려놓은 바위는 자기 무게 때문에 저절로 굴러 내려온다. 신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무 희망도 가치도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처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러분은 벌써 시시포스가 부조리의 영웅임을 눈치 챘을 것이다. 신들에 대한 경멸과 죽음에 대한 증오, 삶에 대한 정열이 무를 성취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저 참혹한 처벌을 그에게 안겨준 것이다. 이것은 지상세계에 대한 정열의 대가로 치러야 되는 것이다. 이 신화에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저 커다란 돌을 들어 올리고 굴려서, 수백 번이나 비탈길을 밀고 올라가는 이야기가 나올 뿐이다.

[카뮈, ‘시시포스의 신화’]』

신의 일에 관여하여 벌을 받게 된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간 후 ‘언덕 위에 돌을 머무르게 하라’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힘겹게 돌을 언덕 정상에 올려놓아도 돌은 자기 무게 때문에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시시포스는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영원히 돌을 굴려 올린다.

만약 시시포스에게 의식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끊임없이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아마도 그는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은 채로 끊임없이 그 일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일.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들이 끝날 때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권태는 의식을 깨워 일으키며 그에 뒤따르는 과정을 불러일으킨다. 뒤따르는 과정이란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의 연쇄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정적인 각성일 수도 있다. 각성 끝에 시간과 더불어 결말이 오는데 그것은 자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상회복일 수도 있다. 권태 그 자체는 어딘가 좀 메스꺼운 데가 있다. [카뮈, ‘시시포스의 신화’]』

○ 인간의 삶은 ‘부조리’하다

인간은 일상의 삶 속에서 문득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봉착한다. 그리고 곧 아무리 애써도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 모든 일을 완벽히 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은 죽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게 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부조리’를 느낀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자각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더욱더 부조리하다. 늘 같은 일과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침이면 다시 서둘러 하루를 시작한다. 바쁘게 살아갈 때는 생각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문득 의식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비극, 이것이 ‘부조리’다.

○ 생쥐의 삶은 ‘부조리’하지 않다

『왜 생쥐의 삶은 부조리하지 않은가? 물론 달의 운행 역시 부조리하지 않지만 그것은 달의 운행이 아무런 목적도 의도적 노력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생쥐는 생존하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 그래도 생쥐의 삶은 부조리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쥐는 자신이 결국은 한 마리의 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줄 자기의식과 자기초월(자기 자신을 떠나 영원 또는 신의 관점에 섬-역자 주)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생쥐에게 이런 깨달음이 생긴다면 그의 삶도 부조리해질 것이다. (중략)

부조리를 느끼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상황을 자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면(그 상황을 부조리하다고 느끼기 전에는 부조리한 것이 될 수 없겠지만), 그렇다면

그 부조리를 우리가 증오하거나 회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부조리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서 생기는 것이다. [토머스 나겔, ‘죽음에 대한 질문(Mortal Questions)’]』

생쥐나 달은 삶의 부조리를 느끼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때로 인생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도적 노력도 없는 생쥐나 달의 운행은 끊임없는 일상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부조리하지 않다. 왜냐하면 생쥐나 달은 결국 자신이 생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줄 자기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 부조리,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일그러진 얼굴, 바위에 찰싹 달라붙은 뺨, 흙 묻은 돌덩이를 떠받친 어깨, 바위를 버티는 발, 새 출발을 위해 한껏 내뻗은 두 팔, 흙투성이의 양손,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가이없는 공간과 시간의 오랜 노력 끝에 비로소 목적이 이루어진다. 그러자 시시포스는 바위가 잠깐 만에 저 아래 세상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또다시 저 돌을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 그는 터덜터덜 평지로 내려간다.

저 잠깐 동안의 멈춤, 저 내려감. 그동안의 시시포스가 나의 관심을 끈다. 그렇게나 바위 가까이에서 애쓴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결코 끝을 알지 못하는 고통을 향해 무겁지만 단호한 걸음걸이로 내려가는 저 사람을 보라. 고통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돌아오는 휴식시간과도 같은 저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

다. 고지를 떠나서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내려오는 저 모든 순간에 그는 자기의 운명을 넘어선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도 단단하다. [카뮈, ‘시시포스의 신화’]』

시시포스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도 영원히 돌을 밀어 올린다. 우리는 여기서 시시포스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시시포스가 부조리 앞에서 내린 선택처럼 인간도 자신의 한계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 상황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떨어진 돌을 다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크든 작든 자신만의 언덕을 향해 돌을 밀어 올리며 또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돌을 밀어 올렸을 때의 짧은 성취감이 주는 환희,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다시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 돌을 볼 때의 허탈감은 오늘도 우리를 언덕 위로 내몬다.

오늘날 인류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누리게 된 것은 인간의 대담한 도전과 발상 덕분이다. 비록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 판명된다 해도, 몇 번의 실패를 거치며 성공이 요원해 보인다 해도 그에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하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수긍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관련 기출문제: 한국외국어대 1998학년도 정시 논술

김은정 ㈜엘림에듀 집필위원 대치 직영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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