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 느림 사라진 근면도 과연 미덕일까
○ 생각의 시작
『부지런함(勤)이란 무얼 뜻하겠는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때 할 일을 저녁때로 미루지 말며,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도록 하고, 비 오는 날 해야 할 일도 맑은 날까지 끌지 말아야 한다.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하고, 어린 사람들은 직접 행동으로 어른의 감독을 실천에 옮기고, 젊은이는 힘든 일을 하고, 병이 든 사람은 집을 지키고, 부인들은 길쌈을 하느라 한밤중(四更)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 요컨대 집 안의 상하 남녀 간에 단 한 사람도 놀고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또 잠깐이라도 한가롭게 보여서는 안 된다. 이런 걸 부지런함이라 한다.[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국어 상 5단원)]』
우리가 가진 ‘상식’의 세계에서 부지런함은 절대적 선(善)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부지런함이란 절대적 선일까요?
○ 뒤집어 보기
우리는 왜 일을 하는 것일까요? 일이 ‘유희(遊戱)’일 수 있을까요? 현대사회에서 일은 유희적 성격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또한 교과서적으로 규정되는 ‘자아성취’로부터도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즐겁게 놀 직장(직업, 일)을 빼앗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용의 불안정’이 ‘생존의 불안정’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부지런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강요나 억압의 한 형태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다양한 삶의 방식이 구성원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고(思考)가 부지런함을 ‘악(惡)’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지런함이 절대적인 선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지요. 위 제시문을 보면 최소한 밤잠까지 아껴가면서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결코 행복한 상황일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오늘의 ‘여유’를 느껴보고 싶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이데올로기화해서 개인에게 강제되는 부지런함은 개인의 특수한 삶의 형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날부터 흥보 품을 팔 제, 상하 평전 지심 매기, 전세 대동 방아 찧기, 북경 장사 편지 전하기, 상부군의 대상 메고, 이집 저집 나래 엮기, 낡은 집에 토담 쌓고, 새집 짓고 왕토하기, 한 말 두 말 마질하고, 여각 주인 말짐 싣기, 오 푼 받고 마철 걸고, 두 푼 받고 쥐구멍 막기, 닷 냥 받고 송장 치기, 날로 벌고 달로 벌어 아무리 극력으로 벌어도 여러 식구 살릴 일이 전혀 없어 곤궁으로 지내더니 [‘박흥보전’(2008학년도 9월 평가원 모의 수능)]』
위 글에 나타난 흥보의 삶을 보면 노동이란 냉혹한 현실의 생존 수단이고, 부지런함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선(善)의 개념이 아닌 것 같습니다.
○ 한 번 더 뒤집어 보기
그러면 부지런함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모두가 게으르기만 하다면,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일이 하나도 진전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 게으름으로 일관한다면 개인의 생존은 물론 사회의 생존도 불가능해지겠지요. 오늘날처럼 국가 간의 경쟁이 개인의 경쟁 못지않게 치열한 시대에는 사회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면 그 사회 구성원의 삶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할 것입니다. 따라서 부지런함은 분명히 우리 사회를 지탱해가는 하나의 덕목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개인에게 밤잠을 설쳐가며 일하기를 강요하는 명분이 된다면 그 사회 구성원들은 압박감으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