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부록과 보유

  • 입력 2008년 9월 22일 02시 56분


고뇌 불안 욕구불만… 삶의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걸까

쇼펜하우어는 성격이 까칠한 철학자였다. 그는 사람들을 대놓고 경멸했다. 식당에 가면 그는 꼭 2인분의 식사를 시켰다. 이유는 자기 앞에 아무도 앉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쇼펜하우어는 유머 감각이 넘쳤고 재치 있게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농담에도 다른 이들의 속을 긁는 가시가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예순이 될 때까지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절망감에 휩싸인 그는 환갑이 지나 ‘부록과 보유’(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쇼펜하우어 인생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라는 작품 하나를 내놓는다.

이 책은 곧 ‘대박’을 터뜨렸고, 세상은 비로소 이 괴팍한 철학자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부록과 보유’는 지금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철학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책머리에서부터 여지없이 ‘삐딱선’을 탄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괴로움이다. 세상은 온통 아픔으로 가득 차 있다. 살면서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별 어려움 없이 일이 술술 풀린다 해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권태가 괴롭힐 테니까. 궁핍은 하류층을 때리는 채찍이고, 권태는 살 만한 이들을 파고드는 채찍이다.”

사람들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이런 노력을 통해 얻은 행복은 ‘거지가 손에 넣은 푼돈’과 같다. 큰 성취를 거두었다 해도 얼마 후면 또 우울해지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버겁고 신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부유함을 손에 넣은 자들도 초라하기는 마찬가지다. 심심함과 우울을 피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돌며 구걸하는 거지들처럼’ 유람을 다닌다.

도대체 삶은 왜 이리 고통스러울까? 쇼펜하우어는 그 이유를 ‘살려는 의지’에서 찾는다. 삶을 움직이는 힘은 식욕과 성욕밖에 없다. 자연은 그 밖에 마치 거창한 무엇이라도 있는 듯이 우리를 끊임없이 속인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온갖 아름다운 말들로 그 까닭을 치장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성욕이 우리를 눈멀게 할 뿐이라며 똑 부러지게 결론 내린다. “그대가 찬양하는 애인이 지금보다 열여덟 살쯤 어리다고 해보라. 그대는 아마 (그 어린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온갖 명분과 예절을 앞세우지만 그들의 깊은 마음속에는 살아남으려는 욕구만 가득 차 있다. “직업은 가면에 불과하며, 가면 뒤에는 돈벌이 꾼이 숨어 있다.” 남에 대한 믿음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우정은 우리의 게으름과 이기심, 허영심에서 비롯된다. 스스로 깊이 생각하기 싫어서 남에게 의존하며,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 상대에게 사랑을 보낸다. 또한 사람들의 인정이 그리워 친구를 찾는다.

하나같이 날이 선 뾰족한 말들이다. 왜 이렇게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황량하게 바라볼까? 책을 꼼꼼히 읽은 사람이라면 잔인한 그의 말 속에서 깊은 인간애를 찾아낼 것이다.

“사악한 이들 탓에 분노가 이는가? 즉시 그의 삶에 눈길을 돌려보라. 그가 얼마나 참혹하고 고된 생활을 이어가는지를 바라보라.”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을 ‘고뇌의 벗’이라고 말한다. 나의 삶이 괴롭듯, 남들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서로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면 서로를 보듬게 되는 법이다.

‘부록과 보유’는 환상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과 마주하게 한다. 숱한 비난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의 이 책이 꾸준하게 사랑받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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