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 읽기-쓰기 기초 부실
학습능력 빨간불
초등학교 4학년 교사 정모(32·여) 씨는 얼마 전 역사 수업을 하다 깜짝 놀랐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새 나라의 이름을 단군이 세운 옛 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조선’으로 정했다고 설명하면서 “새 조선과의 구분을 위해 옛 조선을 ‘고(古)조선’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학생 상당수가 옛 조선의 명칭을 왜 고조선이라고 하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씨는 “아이들의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걸 이전에도 체감한 적이 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며 “교과서에 나오는 기초 한자어도 이해 못하는 학생이 태반”이라고 말했다.
○ 어휘력 달리면 읽기, 쓰기 안 돼
교사들은 인터넷 이용이나 TV 시청시간이 늘어나고 독서나 한자공부에 쓰는 시간이 줄면서 아이들의 어휘력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입을 모은다. 모든 학습의 기초가 되는 읽기와 쓰기 능력이 떨어져 수업 내용을 따라잡기도 벅찬 아이들이 적지 않다. 초등학교 5학년 교사 박모(35·전북 전주시 덕진구) 씨는 “책을 입으로 읽기는 하지만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지 질문하면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5학년 읽기 책에서 뜻을 모르는 단어를 표시하게 했더니 ‘한계, 탈진, 채택’ 등과 같은 단어를 모르겠다는 학생의 비율이 60∼70%에 달했다”고 말했다.
어휘력이 달리다 보니 중간 및 기말시험시간만 되면 ‘문제에 나온 단어의 뜻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일선 초등학교에선 시험 기간이 되면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쉬운 어휘를 찾느라 고심하는 교사의 모습을 보는 것이 낯설지 않다.
어휘력 부족은 쓰기 능력과도 직결된다. 초등학교 고학년생도 공책 반쪽 분량의 쓰기 숙제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서너 줄을 채우는 작문도 못 견뎌 하는 학생이 많다. 어휘가 짧다 보니 문장 구조도 단문 일색이거나 비문인 경우가 많다. 정 씨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어휘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쓰기를 어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다”면서 “‘네가 쓰려 했던 단어가 ○○○이나 △△△아니야?’라고 말해주면 아이들이 머쓱해 한다”고 말했다.
○ 한자어 많은 사회, 과학 학습에도 악영향
어휘력 부족이 학습에 미치는 악영향은 국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4, 5학년이 되면 교과서에 한자어가 많이 등장하는 사회, 과학 등은 어휘가 달리는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는 대표적인 교과목이다.
사회 시간에는 수력발전과 화력발전의 경우 ‘물 수(水)’와 ‘불 화(火)’만 알면 이해할 수 있는 발전방식의 차이를 구분 못해 용어를 그냥 외우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자본(資本), 투자(投資), 중화학공업(重化學工業), 경공업(輕工業)’ 등의 용어는 암호 수준이다.
과학 실력 역시 어휘력이 좌우하는 측면이 크다. 어휘력이 부족하면 ‘발열(發熱) 흡열(吸熱) 반응, 양서류(兩棲類) 포유류(哺乳類)’ 등과 같은 기본 용어에 대한 이해가 힘들어진다. 용어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면 학습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박 씨는 “발열 반응이란 용어를 듣고 ‘열(熱)을 내는(發) 반응’이라는 뜻을 유추할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교과 이해도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영어나 수학도 예외가 아니다. 구체적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많은 초등학교 수준의 영어에서는 어휘력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해 한자어나 추상적인 어휘로 번역되는 단어의 비중이 높아지면 국어 어휘력이 부족한 학생은 독해는 물론, 읽기, 쓰기 등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수학 역시 ‘분수(分數), 합동(合同), 대응(對應)’ 등 기본용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면 학습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도형 부분에서 등장하는 ‘대응’이라는 용어를 이해 못하면 ‘대응점, 대응각’ 같은 관련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
어휘력 부족은 학생 본인의 ‘자각증세’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더욱 무섭다. 어휘력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어도 일상적 말하기나 글자 읽기에 별 지장이 없기 때문에, 자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부모조차 자녀의 어휘력 결핍을 눈치 채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학교도 개별 학생의 어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뿐더러 일괄적인 독서지도 외에는 어휘력 향상법이 사실상 없다. 가정에서 꾸준한 독서와 한자 지도 등을 통해 자녀가 어릴 때 어휘를 확장시켜 놓는 것이 가장 좋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