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세대]<1>재미와 열정(Interest&Passion)

  • 입력 2008년 9월 30일 02시 58분


“놀이가 일이요, 일이 놀이죠” 펀생펀사

“대기업 좋다지만 내가 재미없으면 그뿐”

“즐거운 일이라면 밤새워도 안 힘들어”

IP세대 75.9% “즐겁게 사는게 인생목표”

즉흥 감정 치우쳐 조기 이직등 부작용도



게임업체인 ㈜엠게임에서 3차원(3D) 게임용 캐릭터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는 김주현(25) 씨. 그의 초등학교 시절 취미는 친척 형이 그린 낙서를 따라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만화책을 복사하듯 베껴 그렸고 고등학생 때 신인 만화가의 문하생으로도 들어갔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고3 내내 만화학원을 다니며 만화를 공부했고 ‘컴퓨터그래픽스 운용 기능사’ 자격증도 그때 땄다. 만화에 미친 그에게 정규 대학 졸업장은 별 의미가 없었다. 지난해 5월 ㈜엠게임에 입사한 김 씨의 요즘 심정은?

“내가 좋아했던 취미를 돈 버는 일로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2030 IP(Independent Producer·독립적 생산자) 세대는 재미를 느끼면 며칠씩 밤을 새우고 뜨거운 불길 속도 뛰어들 것 같은 열정을 발휘한다. ‘재미와 열정(Interest & Passion)’은 IP세대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 재미가 ‘밥 먹여’ 주는 세대

자동차정비업 브랜드인 ‘맥과이어스’의 경기 고양시 일산 풍동점 사장인 이종범(23) 씨의 대학 전공은 자동차와 관계없는 토목건축학이다. 그러나 이 씨는 “어릴 때도 자동차 장난감만 가지고 놀았다”는 ‘자동차 마니아’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들어가고 싶은 직장은 자꾸 떨어지고, 합격한 곳은 적성에 안 맞았다고 한다. 이 씨는 “하루 최대 10시간 자동차와 씨름하지만 즐겁다”고 말했다.

월드사이버게임즈(WCG)의 ‘위크래프트3’ 부문 국가대표이자 세계 최강자인 장재호(22) 선수.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게임에 미쳐 지내다 고교 2학년 때 프로게이머로 입문했다.

장 씨는 지금도 “하루 20시간 정도 연습한다. 잠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털어놓는다. 국제대회가 많다 보니 외국 게이머들과 메신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다. “게임을 워낙 좋아해서 질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명예도 얻고 돈도 버는데 힘들 게 있겠어요”라고 되묻는 그의 연간 수입은 1억 원이 넘는다.

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3층짜리 상가건물 지하실. 20대 여성들로 구성된 퓨전국악밴드 ‘황진이’의 연습실이다. 최신 가요처럼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해금을 맡은 백지혜(28) 씨는 “‘지루한 국악’이 아니라 ‘즐거운 국악’을 만들겠다는 것이 우리의 꿈”이라며 “우리도 즐기면서 국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IP세대는 ‘놀이하는 인간’

12일 오후 6시경 서울 구로구 구로동의 ‘댄스조아’ 연습실.

추석 연휴(13∼15일) 하루 전날임에도 2030세대의 직장인 5명이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울려 퍼지는 가수 서인영의 ‘신데렐라’를 들으며 최신 댄스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건설회사에 다닌다는 박지영(27·여) 씨에게 춤을 배우는 이유를 묻자 “즐거우니까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댄스학원의 정은희 원장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춤=다이어트’라는 인식이 강해 미용 목적의 여성 고객밖에는 없었다”며 “요즘은 개인기를 연마하려는 직장인이 학원 수강생의 70% 정도”라고 말했다.

삼성의 한 임원은 “IP세대는 ‘일이 곧 놀이이고, 놀이가 곧 일’인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세대”라며 “최근 대기업을 중심으로 즐거운 ‘펀(fun) 경영’이 확산되는 것도 이들 IP세대가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주요 200개 기업을 대상으로 ‘펀 경영의 시행 효과’를 물은 결과 ‘좋은 일터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응답이 85.8%나 됐다.

‘펀 경영’ 시대에 재미있는 직원은 인정받는다. 입사 3년차 은행원인 박호윤(28) 씨는 부서 회식이나 거래처와 술자리가 있는 날이면 출근 전에 ‘소품’을 꼭 챙긴다. 노래방에서 선보일 가발을 비롯해 폭죽, 심지어 슈퍼맨 복장까지 준비한다. 최근에는 9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의 히트곡 ‘키싱 유’를 부르기 위해 소녀시대가 TV에 들고 나왔던 막대사탕까지 구입했다.

박 씨는 “직장 상사들이 분위기를 띄워야 할 중요한 자리가 있으면 고참 선배는 안 데려가도 나는 꼭 ‘챙긴다’. 즐거움을 주는 능력은 개성 시대의 강력한 무기”라며 웃었다.

제일기획이 지난해 10∼50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조사한 결과 ‘즐겁게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전반적 목표’라는 항목에 ‘그렇다’라고 대답한 IP세대(20, 30대) 평균은 75.9%로, 10대(71.1%)보다도 높았다. 40대는 69.5%, 50대는 61.9%에 그쳤다.

○ 이끼가 끼지 않은 ‘혼자 구르는 돌’

IP세대가 열정을 갖고 매진할 일의 기준이 ‘재미있느냐 없느냐’는 주관적이고 때론 즉흥적인 감정에 근거하면서 그에 따른 사회적 손실도 발생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가 최근 전국의 100인 이상 사업장 345개 사(社)를 대상으로 대졸 신입사원 이직률을 조사한 결과 ‘입사 후 1년 이내 퇴사율’이 27.9%에 달했다. 특히 중소기업은 36.6%나 됐다.

이런 높은 조기(早期) 이직률은 궁극적으로 IP세대의 취업난을 스스로 가중시키고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IP세대의 재미와 열정을 개개인의 삶 속에서 머물게 하지 말고 ‘사회적 파이’를 크게 하는 방향으로 모으는 길을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국가가 함께 모색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회적 이슈보다 마니아적 취미 몰두

■ IP세대는 386세대와 뭐가 다른가



동아일보가 이번 시리즈에서 ‘IP세대’로 정의한 2030세대는 직전 세대인 이른바 ‘386세대’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현재 40대가 된 386세대는 1980년대 권위주의적 정권 시절 대학을 다녀 ‘반(反)독재 민주화’ 등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들은 사회에 관심이 많은 세대로 명분과 사회적 규범을 중시하며 이는 민주화 투쟁과도 연결된다”고 말했다. 다만 일부 386세대는 ‘저항’의 과정에서 친북좌파 성향으로 기울기도 했고 학창시절 충분한 실력을 쌓는 데 소홀했다.

386세대 이후 사회적으로 논의된 신세대론으로는 1990년대 초·중반의 X세대와 2000년대 초반의 N세대(Net Generation)가 있었다. 하지만 X세대의 기운은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맞으며 꺾였다. 청년 실업의 그늘 때문이었다. 또 N세대는 젊은 세대의 온라인 문화만을 표현한 한계가 있었다.

지금의 IP세대는 X세대와 N세대의 일부 특징을 아우르는 측면도 있지만 1인 블로그, 손수제작물(UCC) 등으로 상징되는 ‘독립적인 생산자’의 특징을 뚜렷이 보인다. 세계화의 축복과 시련을 모두 겪어 글로벌 능력도 이전 세대보다는 훨씬 뛰어나다. 사회적 이슈보다 마니아적인 취미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블로그와 미니홈피 등 자신만의 공간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IP세대는 집단행동조차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과 같이 하면 더 즐겁지 않을까’ 하는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분석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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