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의 경쟁력]④ 재즈가수 윤희정의 '인맥'

  • 입력 2008년 10월 5일 06시 25분


"I'm a Jazz Singer (나는 재즈 가수예요)"

25일 서울 서대문의 한 아트홀. 변보경 코오롱아이넷 대표가 무대에 올라 "나는 재즈 가수에요"라고 속삭이며 'My One and Only Love'를 열창했다.

변 대표가 마치 직업 가수처럼 조명을 받으며 재즈를 부른 무대는 '윤희정 & 프렌즈' 공연 이었다.

1997년 7월부터 11년째 '윤희정 & 프렌즈' 공연을 이어온 재즈 가수 윤희정(53)은 명사들 사이에서 소문난 '재즈 선생'이다.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명사들 사이에서 와인 배우기 붐에 뒤이어 부는 재즈 배우기 붐의 중심에는 '재즈 전도사' 윤희정 씨가 있다.

변 대표처럼 윤씨에게 재즈를 배워 무대에 오른 명사들은 심재혁 인터컨티넨탈호텔 대표, 이출선 서원산업 대표, 박의승 대우건설 전무 등 기업인들, 김미화 송일국 박상원 김효진 박경림 이현우 등 연예인들, 이은결 마술사, 강건국 가일미술관장, 송인준 변호사(전 헌법재판관) 등 각계 명사 250여 명에 달한다.

선뜻 나서기 어려울 것 같은 재즈 공연 무대에 200여 명의 명사들을 불러낸 윤 씨의 비결은 무엇일까. '재즈 전도사' 못지않게 '인맥의 달인'으로도 유명한 윤 씨를 서울 용산구 이촌1동 그녀의 집 앞에서 만났다.

윤 씨는 "재즈의 힘이지 제 힘은 아닐 것 같은데…"하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인터뷰 도중 간간이 그의 '제자'였던 대기업 사장, 유명 연예인으로부터 일상적 안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공연을 위한 일회성 만남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놀라웠다.


▲ 영상 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김재명기자

● 인맥 형성의 비밀은 '적극적인 대시'

11년째 88회를 이어온 공연 때마다 그 바쁘다는 스타, 기업인들을 무대에 세운 '인맥 형성의 비밀'은 엉뚱하게도 '114'였다.

"기업인 장관 국회의원 등의 연락처는 114에 물어보면 다 나와요. TV를 보다가 양진석 씨 목소리가 참 좋다 싶으면 양진석씨가 운영하는 회사 전화번호를 114에 물어 전화하는 거죠."

전화를 하면 그녀는 에둘러가는 법이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저 윤희정입니다. 같이 무대에 서고 싶어요" 이야기한다.

상대가 황당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일단 그렇게 말문을 트고 나면 그 다음 수순은 '집요한 대시'다.

"송인준 전 헌법재판관은 섭외하는데 6개월이나 걸렸어요. 계속 거절을 당했는데 우연히 시를 쓰신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 분의 자작시 '들국화'에 재즈곡을 붙여 보내드렸고 '제 공연을 두 번만 봐 주세요' 하고 부탁했더니 결국 허락하셨어요. 헌법재판관을 그만 두신 뒤 변호사로 무대에 서게 되셨지만…"

공들인 섭외가 물거품이 되는 경우도 많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끼'가 다분해 보였고 꼭 무대에 같이 서고 싶었다. 역시 '114'를 통해 섭외를 시도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이 터지는 바람에 그만 무산됐다.

11년간 250여 명을 무대에 세우기까지 섭외 요청을 거절당한 사람의 숫자도 얼추 그와 비슷하다. 거절 한 두 번에 마음 상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는 어땠을까. 정작 그는 별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안 되면 또 하면 되죠. 실패 없는 인생이 어디 있나요?"

그녀에게 재즈를 배운 제자들은 1년에 2~3회씩 모임을 만들어 꾸준히 만난다. '제자들'이 늘면서 섭외가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그녀는 직접 전화를 걸어 무대에 함께 설 것을 부탁한다.

목소리가 시원시원하고 열정적인 그녀의 화술엔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영화배우와는 영화 얘기를, 기업가와는 회사 비전을, 비행사와는 비행기에 대해 이야기해요. 재즈 가수라고 재즈 얘기만 하면 재미없지 않아요? 날마다 메모하는 게 일이에요. 남의 얘기도 받아 적고 인터넷도 보다가 재미있는 유머가 있으면 적어두고, 그렇게 화젯거리를 찾아 공부하는 것도 제 중요한 일과예요."

인터넷상의 인맥 관리는 '싸이월드'로 한다. 방문자수가 8만 9000명 정도인 그의 미니 홈피는 유명 가수들에 비해 많은 수는 아니지만 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방문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일촌을 맺고 있는 사람은 300명 정도로 음악으로 교감하는 가까운 사람들이다.

수많은 제자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사람은 누구일까.

"1997년 7월 '윤희정 & 프렌즈' 첫 회 게스트로 출연한 뮤지컬 배우 남경주가 기억나고…"

남씨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돌아온 후에 큰 배우로 성장해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고 한다. 뮤지컬 배우 이소정, 개그우먼 김미화, 탤런트 박상원 씨도 음악적인 '필'이 잘 통했다. 그녀의 제자 자랑은 끝이 없었다.

"탤런트 송일국 씨는 깜짝 놀랄만한 노래 실력을 가졌어요.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무대 매너도 뛰어났죠. 7개월간 공부한 영화배우 김효진은 영화 '누구나 비밀은 있다'에서 재즈보컬리스트 역할을 맛깔스럽게 소화해서 기억에 남고요."

그녀의 제자들은 또 재즈 전도사가 되어 꾸준히 활동한다. 김미화 씨는 지인들과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고 홍영선 카톨릭 의대 교수는 평화방송에 출연해 노래를 하기도 했다.

● 각 분야의 최고가 무대에서도 최고

그녀에게 재즈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기 중이지만 윤 씨에겐 제자 선택의 확고한 잣대가 있다. 목소리가 재즈에 맞을 것과 성실한 직업인일 것, 그리고 독특한 개성이 있을 것. 이 세 가지다. 무대에 서려면 최소 2~ 3개월 가량 맹훈련을 받는다.

"아무나 무대에 같이 설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제법 감이 생겨서 3분 만 이야기해보면 상대가 같이 무대에 설 만한 사람인지 알아 볼 수 있어요."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목소리가 좋든 나쁘든 재즈에 맞는 목소리는 따로 있다. 개그우먼 박경림의 쉰 목소리가 재즈랑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해 보컬을 사사했고 예상대로 그녀의 재즈 무대는 대박이었다.

유명 인사들을 주로 섭외하는 까닭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는 '성실한 직업인'들이 무대에서도 최고이기 때문이다.

"스타들의 자세를 보면 정말 자신의 몸값을 하니까 스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습에 임하는 자세도 프로답고 무대에서도 카리스마를 보여주죠. 성실한 직업인을 기준으로 섭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는 사람들은 무대를 대하는 자세도 최고죠."

'윤희정 & 프렌즈' 공연은 1997년 홍사종 당시 정동극장장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장기적인 재즈 공연을 해 보면 어떻겠느냐 먼저 제안을 받은 것.

"장기 공연을 할 자신이 없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번 거절했더니 다음 계약 때 수입 분배가 6(윤씨)대 4 에서 4대 6 으로 바뀌더라고. (하하) 지금도 '윤희정 & 프렌즈' 공연으로 돈을 벌지는 못 합니다. 공연을 기다리시는 분들에게 즐거움을 드리고 '윤희정 브랜드'를 만드는 문화사업이라고 생각해요. 돈은 다른 공연에서 벌어야죠."

'윤희정 & 프렌즈' 공연이 지나치게 유명인의 명성에 의존하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다.

"사람들은 '윤희정 & 프렌즈'에 누가 출연하는가에 관심을 갖지만 나는 재즈를 대중에게 친숙하게 만들었다는 데 자부심이 있어요. 한 번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재즈를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 보람을 느낍니다. 재즈를 부르면 대중이 외면했고 대중을 따르면 재즈가 무너졌어요. 이제 그 접점을 찾았고 한국에 재즈를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 내 최고의 인맥은 바로 딸

이번 '윤희정 & 프렌즈' 공연에는 변보경 대표 외에 가수 윤복희 씨도 함께 했다. 교회에서 만나 신앙과 음악을 나누는 정신적인 꼴이 맞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윤복희 언니가 30년 동안 이어진 인연으로 함께 무대에 서줬어요.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포스'를 가진 언니가, 57년간 남의 무대에 서 본적이 없는 언니가 '네 무대를 망치면 어떡하니' 하더군요. 쌓인 내공만큼 겸손한 분이죠."

윤희정의 친구들… 매회 공연을 보러 오는 팬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녀의 최고 인맥은 누구일까. 윤 씨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딸 김수연을 들었다. 김씨는 전 '버블 시스터즈' 멤버로 최근에 영화 '도쿄 여우비'의 OST를 담당하기도 했다.

"세대 차이를 넘어 저는 딸과 음악으로 대화합니다. 재즈 셔플 리듬에 애드립 16소절을 비워놓고 수연이에게 '채워 봐' 그러면 마치 제 머릿속을 들여다 본 것처럼 노래를 해요. 정말 제게 힘이 되는 아이입니다."

● "나는 에너지 전달자"

자리를 옮겨 그녀가 25일 공연에 쓰일 드레스를 가봉하러 가는 길에 동행했다. 이번 드레스는 윤씨의 공연을 보러 왔다가 인연이 닿은 디자이너 김혜영 씨의 작품이다.

윤 씨는 재즈가 곧 자신의 인생이라며 각별한 사랑을 표현했다.

"1972년에 '세노야 세노야'를 부르는 포크 가수로 가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포크송으로 3집까지 냈고, 이후에는 가스펠 송(복음성가)을 주로 불렀죠. 92년에야 재즈 이론가 이판근 선생을 만나 재즈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36살이나 되서야 재즈를 만나다니…. 이판근 선생은 제 음악의 대부이자 '재즈가수 윤희정'을 완성시켜 주신 분입니다. 이판근 선생을 만나 재즈에 입문한 것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어요."

그녀는 '탑'이라는 말보다 '온리 원'이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한다. "성공이란 단지 1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 아니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윤희정 & 프렌즈'에 대한 온갖 평가 중 11년간 공연을 이어온 유일무이한 재즈 공연이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흐뭇하다.

"한 번도 '윤희정 & 프렌즈'의 끝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내 삶의 목표가 되었으니까요. 내게 재즈는 인생 그 자체입니다. 막연한 표현이지만 사실이에요. 1년 내내 공연을 하려면 매일 연습을 해야 하니 다리에 쥐가 나서 걸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무대에 섰을 때…그 때 나오는 엔도르핀이 나를 숨쉬게 합니다."

사람들이 그녀의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 그녀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구름을 볼 때 어떤 사람은 그 위의 태양을, 또 어떤 이는 구름 밑의 비를 생각하죠. 저는 구름 위의 태양을 생각하는 축에 듭니다. 12번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 자산은 '긍정'과 '끈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정확했다. 그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나는 걸 보면 말이다. "실패해도 괜찮아, 틀리는 게 왜 두려워" 라는 그녀의 큰 목소리가 귀에서 계속 울리는 것만 같았다.

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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