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논리와 사고]글 행간의 맥락을 읽자

  • 입력 2008년 10월 20일 02시 56분


소풍날 아침 “비가 오네”

우산 장수의 “비가 오네”

같은 명제 다른 진술… 글 행간의 맥락을 읽자

일반적으로 모든 글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입니다. 따라서 글을 읽거나 쓸 때는 글 자체만이 아니라 글이 쓰이는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글의 저자, 집필 상황, 염두에 두었던 독자 등이 바로 맥락에 포함되는 주요 항목들입니다.

맥락을 고려한다는 것은 주장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이해할 때 ‘명제’의 관점이 아니라 ‘진술’의 관점에 선다는 것을 말합니다. 명제란 글자 그대로의 의미, 즉 문장의 뜻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와 ‘비가 내린다’, ‘It rains’는 모두 다른 형태를 가진 다른 문장들이지만 같은 뜻의 문장입니다. 따라서 같은 명제입니다. 이처럼 명제는 표현되는 언어나 구조에 상관없이 그 문장이 가진 뜻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진술은 어떤 상황에서 특정한 화자(話者)가 특정한 청자(聽者)에게 내뱉은 주장을 가리킵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했는지에 따라서 그 속뜻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제의 관점에서는 같은 주장이지만 진술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인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오네’라는 주장은 명제의 관점에서는 누가 말하건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다음 두 경우를 비교해 봅시다. 첫 소풍을 손꼽아 기다리던 유치원생이 있었습니다.

소풍 가는 날 아침 일찍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어보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톤으로 한마디 내뱉습니다. “비가 오네.” 반면에 길가에서 우산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우산장수가 있었습니다. 맑은 날씨 때문에 보름째 허탕을 치다가 아침에 창을 열고 비가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쁨에 찬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습니다. “비가 오네.”

두 진술은 명제로는 같은 의미를 가지지만 진술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진술입니다. 사실 우리가 내뱉는 대부분의 말은 이처럼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화자에게 하는 진술이고, 우리가 쓰는 논증적인 글도 대부분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가상의 논쟁자를 전제로 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므로 맥락을 고려하는 것 역시 논술 고수가 펼쳐야 할 기본 초식 중 하나입니다.

맥락 중에서도 독자에 대한 고려는 특히 중요합니다. 글을 쓸 때 적합한 내용을 담아 설득력을 높이려면 당연히 독자를 고려해야 합니다. 글을 읽을 때에도 글의 속뜻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저자가 겨냥하고 있는 독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고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의 저자도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지만 그 상황이 가진 보편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고전으로 평가되는 사례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전을 읽을 때에도 ‘진술’의 관점에 서서 특히 염두에 두었던 독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제대로 의미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류 최고의 고전 중 하나인 성서를 예로 들어 볼까요? 성서는 위대한 고전이기 때문에 아마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번 읽어보려고 시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경우 성스럽고 심오한 교훈을 기대하면서 책을 펴 보면 처음부터 혼란과 당혹감에 빠지게 됩니다.

맨 처음 나오는 마태복음을 보면 1장부터 교훈적인 말씀은 나오지 않고 족보부터 나옵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지루한 기록들이 한참 지속됩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일단 인내하고 내용을 다 읽은 후 다음 얘기로 넘어가면 독자는 다시 한 번 짙은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처녀탄생 얘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부계 족보를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 읽었는데 예수가 신이 직접 잉태시켜서 처녀 몸에서 났다고 하면 앞의 부계 족보는 의미 없는 얘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성급하고 성깔 있는 독자라면 여기서 벌써 책을 던져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진술의 관점에서 보아 독자를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마태는 유대지방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전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독자로 의식하고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하여 두 가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정통 다윗 왕가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나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로 치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조의 왕손 중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민족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셈이지요.

다른 하나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메시아에 대해 했던 예언에 대한 믿음입니다. 처녀가 메시아를 낳을 것이라는 것이 바로 예언의 내용 중 하나입니다. 바로 이 두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예수의 부계 족보를 먼저 보여주고 다음으로 예수의 처녀 탄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도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논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론은 예수가 메시아란 것이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논거를 선택하여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상황은 다른 고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에 들어있는 멋진 구절을 가슴에 새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맥락을 이해해 고전의 참된 메시지를 해석해 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박정하 성균관대 교수, 의사소통교육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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