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통섭

  • 입력 2008년 10월 20일 02시 56분


자연과학, 인간 탐구의 ‘비밀 열쇠’

괴테와 쇼펜하우어는 각각 독일을 대표하는 문학가와 철학자이다. 이 둘의 관계는 편하지 않았다. 괴테의 견해에 대해 쇼펜하우어가 날카로운 반론을 폈기 때문이다. 이 둘을 갈라놓았던 논쟁은 광학(光學), 즉 빛의 본성에 대한 것이었다.

시인과 철학자가 과학논쟁을 벌였다니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철학자이면서도 수학자로 유명했다. 뉴턴은 만유인력만큼이나 글 잘 쓰기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과거 지식인들에게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학문의 세계는 ‘전문화’라는 이유로 작은 전공으로 쪼개지기 시작했고 현재 두 학문은 완전히 갈라선 상태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consilience)’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일을 주장하는 책이다. 윌슨의 주장은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다. 우리네 입시에서 앞세우는 ‘통합교과적 사고’도 두 분야의 연결을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윌슨이 주장하는 ‘통섭’은 ‘통합교과’나 ‘학제적(inter-discipline)’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오히려 자연과학으로 정치, 경제, 사회 등 인문학 전체까지 설명할 수 있다는 쪽에 가깝다. 인간 삶의 문제들을 생물학이나 물리학의 탐구로 해결하려는 환원주의(reductionism)인 셈이다.

경제학을 예로 들어 보자. 경제학은 효율적으로 살림살이를 가꾸는 방법을 밝히려 한다. 경제학자들은 여러 가지 통계와 분석을 통해 사회의 움직임을 탐구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온전치 못하다.

경제 흐름을 온전히 짚으려면 인간의 마음도 알아야 한다. 경제를 굴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감정과 생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은 무엇일까? 심리학이다. 이렇게 경제학은 심리학과 한 가지로 이어진다.

줄기는 더 뻗어나간다. 심리학은 생물학 없이는 온전하지 못하다. 예전에는 정신이상자를 상담으로 고치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환자의 두뇌 MRI 사진을 바라보며 정신과 약을 처방한다. 뇌 과학이 마음의 비밀을 상당수 풀어낸 까닭이다.

심리학이 제대로 되려면 진화생물학의 도움도 필요하다. 사람에게는 독특한 ‘후성규칙’이 있다. 후성규칙이란 유전적으로 이어지는 사람 고유의 특성을 뜻한다. 이를 잘 알고 있으면 마음을 읽고 경제를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생물학은 분자를 다루는 화학을 통해 한층 깊어진다. 동식물이 살아가는 원리를 화학구조를 통해 좀 더 근본적으로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윌슨의 주장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나치주의자들은 우생학(優生學)으로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고 했다. 인간 사회도 야생의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사라진다. 나치는 이런 원리로 우월한 인종인 ‘아리안족’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과학 이론을 세워 자신들의 삶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윌슨의 생각이 조금은 위험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윌슨은 자연과학으로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인간과 문화에 대한 해석은 자연과학의 도움을 받아야만 비로소 온전해진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통섭’은 1998년에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다윈이 진화론을 내놨을 때만큼이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다윈은 인간을 원숭이의 위치로 내려놓았지만 인간이 그 이하로 더 타락하지는 않았다.

윌슨은 인간을 생물학과 화학, 물리법칙으로 설명해내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과학의 시대인 현대사회에서 ‘통섭’은 인간을 탐구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볼 일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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