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범죄 징후가 없다는 이유로 돌아간 뒤 실제로 살인이 일어났다면 국가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7부(부장판사 최완주)는 남자 스토커에게 살해당한 여성의 유가족이 “경찰의 안이한 대처로 살해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심을 깨고 “국가는 26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2일 밝혔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2006년 9월 10일 오전 8시경. 경기 시흥시 다세대주택 3층에 혼자 살던 A(당시 27세) 씨 집에 헤어진 남자친구 B(28) 씨가 찾아왔다. 이미 9일 전 스토킹 혐의로 긴급 체포됐던 B 씨는 이날 다시 사귈 것을 요구했다. A 씨는 이를 무시하며 직장 선배와 전화하며 집 밖으로 나가려 했다.
화가 난 B 씨는 A 씨를 때리며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A 씨는 통화 중인 선배에게 “살려 달라”고 외쳤다.
선배는 현장으로 달려갔고 폭행을 목격한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곧 A 씨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A 씨의 선배는 경찰에게 “얼마 전 체포됐던 스토커 같다”며 강제로 문을 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은 “가족의 요청 없인 들어갈 수 없다”며 망설였다. 다세대주택 관리인도 수색영장이 없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경찰은 2m 떨어진 옆 건물 3층 옥상에 올라가 A 씨 방을 살펴봤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1시간 만에 철수했다. 그동안 B 씨는 A 씨 입을 청테이프로 막고 성폭행한 뒤 흉기로 살해했다.
A 씨 유가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1심 법원은 “경찰이 인기척 없는 집 안에서 범죄가 일어나는지 알기 힘들었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신고 내용이나 A 씨 선배의 현장 진술로 볼 때 성폭행 등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피해자에게 전화연결을 시도하지 않았고 가해자로 의심되는 B 씨의 긴급체포 혐의도 확인하지 않았다”며 A 씨에게 1000만 원, 부모에게 각 500만 원, 형제자매 3명에게 각 200만 원 등 모두 26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