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SCHOOL DIARY]무대 위 오빠들 보면“오길 잘했어”

  • 입력 2008년 11월 4일 02시 54분


10월 30일 오후 5시 반 서울 강서구 KBS 88체육관 앞.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늘어선 줄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200m도 넘게 이어져 있었다. 케이블 방송 엠넷(Mnet)의 가요 프로그램 ‘엠카운트다운’ 생방송을 보려는 학생들이었다.

줄 앞쪽의 중학교 3학년 한모 양은 실내화 두 짝으로 달려드는 날파리를 잡으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미리 와서 입장 번호를 받았어요”라며 자랑스레 내민 팔에는 ‘T176’이라는 암호 같은 입장번호가 적혀 있었다(사진). ‘동방신기 팬들 중 176번째로 입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학교가 5분 거리에 있지만, 혹시 늦을까봐 택시를 타고 2분 만에 와서 겨우 받은 번호다. 한 양과 두 명의 친구는 매주 ‘엠카(엠카운트다운)’를 보러 온다. 생방송은 7시에 시작하지만 보통 2∼4시간을 기다린다. 요즘은 바깥날씨가 제법 추워 친구 정모 양은 아예 무릎담요를 가져와서 스커트처럼 교복 치마 위에 둘렀다. 식사는 항상 노점상에서 간단히 해결한다. 줄을 벗어날 수 없으니 한 명이 돈을 모아 호떡이나 붕어빵을 사온다.

춥고 배고픈 ‘방청 생활’을 그만둘 수 없는 건 동방신기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기쁨 때문. 4시간을 기다려 4분을 보는 셈이지만, 무대 위에 선 오빠들을 보면 ‘아, 오길 잘했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짧은 순간에는 어떻게든 오빠들 눈에 띄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펼쳐진다. 중학교 3학년 이모 양은 일단 복장이 튀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랜 경험상 동물 잠옷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만화 캐릭터 햄토리 복장 정도면 충분히 눈길을 끌 수 있다. 매번 입으면 얼굴도장을 찍는 효과도 있다. 복장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손동작을 최대한 크게 하거나 춤이라도 따라 춰야 한다. 이 양은 “쪽팔려도 오빠들이 눈길을 줄 때까지 끈질기게 계속 한다”고 말했다.

요즘 방송사 가요 프로그램은 팬클럽 단위로 방청한다. 가요 프로그램 공연이 있는 날이면 기획사 직원이 현장에 나와서 입장번호를 주고 풍선 등 응원도구를 나눠준다. 입장번호는 선착순이지만 해당 가수의 최신 CD케이스를 열어 보여줘야 받을 수 있다. 이날도 현장에는 2개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긴 줄은 동방신기 팬들이 늘어선 줄, 짧은 줄은 다른 가수들의 팬이 뒤섞여 서 있는 줄이었다. 정장 차림의 덩치 큰 경호업체 직원이 이 두 줄에서 각 가수의 팬들에게 배정된 숫자에 맞춰 학생들을 공연장으로 들여보냈다.

그날 출연하는 가수의 팬이 아닌 학생들은 어느 줄에도 서지 못하고 방황하기도 한다. 소녀시대 팬이라는 고교 2학년 김모 군도 친구와 함께 멀찍이 떨어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김 군은 “오늘은 동방신기 팬이 많아선지 남자가 1∼2%밖에 안 된다”며 줄 서는 것을 어색해했다.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집이나 연습실 앞에서 기다리며 ‘사생을 뛸(사생활을 쫓아다닌다는 뜻)’ 때 남학생들은 인터넷 팬 카페에서 얌전히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공연이 있는 날에는 팬카페 채팅방에 들어가서 그날 공연에 대한 소감이나 사적인 이야기를 소소히 이야기하는 정도다. 어찌 보면 소박한 동아리 같은 느낌이다.

공연장 안에서의 응원 문화도 다르다. 여학생들은 좋아하는 가수가 객석 옆으로 등장하기만 해도 고음으로 비명을 지르지만, 남학생들은 무대 위에 올라가서 노래를 시작했을 때에야 기획사나 팬 카페에서 정해준 응원 문구를 저음의 걸걸한 목소리로 얌전히 따라 외친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김 군의 말대로 여학생이 전체의 98∼99%를 차지했다. 빨강색 풍선(동방신기 팬)과 은색 술(비 팬)이 공연장을 뒤덮고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나올 때마다 여학생들은 고막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귀를 막고 있는 건 20∼40대 기자들뿐이었다.

공연이 끝나도 팬들은 돌아갈 줄을 몰랐다. 엠넷 홍보팀의 오지은 팀장은 “동방신기 컴백 무대가 있었던 날에는 방송이 끝난 후에 체육관 앞에 택시가 10대나 대기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연습실로 돌아가는 동방신기의 뒤를 쫓기 위해 일부 학생이 콜택시를 부른 것. 이날 밤 9시 방송이 끝난 체육관 앞에는 어김없이 3대의 콜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세미 luckyse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