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인철]수능일에 생각하는 대입자율화

  • 입력 2008년 11월 14일 03시 00분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된 13일 시험장 분위기를 알아볼 생각으로 오전 7시 반 출근길에 집 근처의 한 고교를 찾았다. 교문 앞에는 수험생 선배와 자녀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온 고교생과 학부모들로 북적이고 구호로 요란했다.

오랜만에 시험장 현장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필자가 대입시험을 보던 경험이 떠올랐고, 초년병 기자 시절 추운 날씨에 수험생들을 붙잡고 출제 경향과 난이도를 취재하던 기억이 스쳐갔다.

수험생을 위한 응원 풍경이나 구호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누런 주전자에 끓인 보리차나 꿀물을 나눠주고 ‘대○○고, 파이팅’을 외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요즘 격문이나 응원전은 광고 카피를 뺨칠 정도다.

‘400점 만점에 만점’ ‘빠르네 빠르네 빠르네!’ ‘떡하니 합격하세요!’…. 그 가운데 ‘수능 등급=아내 얼굴’이란 제목에 연예인 사진을 곁들인 피켓은 신세대들의 톡톡 튀는 발상을 보여준다. 1등급은 김태희, 2등급 구혜선, 3등급 한효주, 4등급 한지혜라고 한다. 성모(고3·18) 군은 “여학생들은 ‘1점 더 맞으면 신랑감이 바뀐다’고 한다고 하는데 남학생들은 예쁜 아내를 얻으려면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등급을 올려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방문하는 외국의 교육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수능이 어떻게 치러지는지에 대해 브리핑을 하면 눈이 휘둥그레진다고 한다. 전국에서 58만여 명이 지원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험에 비해 큰 사고 없이 ‘군사작전’ 하듯 일사불란하게 해치우는 것을 보면 놀랄 법도 하다.

전국의 출퇴근 시간이 늦춰지고 시험장 200m 이내에는 차량 통행과 경적이 금지되고, 듣기평가 시간에는 비행기 이착륙이 조정되고 열차도 학교 근처를 운행할 때는 속도를 늦춘다. 지각 수험생 수송을 위해 경찰과 해병전우회 순찰차가 시내를 왱왱거리며 질주한다.

어디 그뿐인가. 1000명의 수능 출제·관리요원들은 외부와 격리된 장소에서 한 달 가까이 ‘감옥살이’ 출제를 해야 한다. 집에 안부 전화도 못하고, 부모상을 당해도 보안요원의 감시 속에 4시간밖에 빈소에 머물지 못한다.

실제로 외국인들은 수능을 벤치마킹하고 싶다는 제의를 하기도 한다. 몽골 정부는 2006, 2007년에 고위 교육공무원들을 보내 연수를 시키기도 했다.

이런 수능도 1994학년도부터 17번째 치러지는 동안 정권에 따라 ‘주가’가 널뛰기를 했다. 쉬우면 ‘물수능’, 어려우면 ‘불수능’이란 꼬리표가 뒤따랐다. 도입 초창기의 정부는 수능을 획일적 주입식 교육을 탈피하고 ‘고등사고능력’을 평가하는 최고의 시험으로 자랑했지만 참여정부는 점수 따기 사교육의 주범으로 깎아내렸다. 각 대학에 수능 반영을 줄이고 학교생활기록부 반영을 늘리도록 압박하는 바람에 대학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부가 확실한 신뢰를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학들은 그나마 수능이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결과 앞 다퉈 수능우선선발을 늘렸고 서울대도 2010학년도 정시모집 2단계에서 면접구술을 없애고 수능을 20%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조금이라도 실력이 나은 학생을 뽑고 싶어 하는 것이 대학의 속성인데 인위적으로 가로막으면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한 걸음에 대학자율화를 이룰 수는 없지만 이제 학생선발권은 대학에 돌려주는 것이 순리다.

이인철 교육생활부장 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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