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있게 죽을 권리’ 어디까지 허용?… 사회적 논란 예고

  • 입력 2008년 11월 29일 03시 04분


■ 판결 의미와 전망

재판부 “가족 판단만으로 치료중단 안돼” 확대해석 경계

병원 직접 방문해 前現 담당의사 증인신문

말기암-뇌사환자 年10만명 인공호흡기 의존

법원의 존엄사(尊嚴死·소극적 안락사) 인정 판결은 환자들도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원고 김모(76·여) 씨처럼 회복 가능성이 없어 치료가 의학적으로 무의미하고 환자가 치료 중단을 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면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의해 병원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는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밝힌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다 사망하는 말기 암 또는 뇌사 환자는 연간 최소 10만 명. 이번 판결에 따라 이들 환자의 가족 중 상당수가 소송 여부를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또 존엄사의 범위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지를 둘러싼 거센 논란도 예상된다.

▽판결 나오기까지=김 씨는 2월 폐암 발병 여부 확인을 위해 조직 검사를 받던 중 폐혈관이 터지면서 의식을 잃었고 곧 뇌사 상태에 빠졌다. 김 씨 가족들은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5월 “환자가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숨질 권리를 달라”며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치료중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6월 병원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다.

법원은 7월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존중돼야 하지만 치료가 의학적으로 의미 없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며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 그러나 본안소송에선 재판부가 김 씨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국내 첫 존엄사 공판이라는 중요성을 감안해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김 씨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아 전현직 담당의사 2명에 대해 증인신문을 실시하는 등 현장검증을 하기도 했다.

▽환자 가족 줄 소송 가능성=세브란스병원은 “판결문을 분석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의료계가 그동안 소극적 안락사의 허용을 여러 차례 주장해왔기 때문에 병원이 항소를 포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될 경우 소극적 안락사는 법적으로 보호받게 된다. 이 때문에 말기 암이나 뇌사 환자 가족의 줄 소송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이날 서울의 대형 병원을 취재한 결과 김 씨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환자들이 병원에 따라 많게는 5명까지 있었다. 서울 강남성모병원의 경우 말기 소아 뇌소중 환자 1명, 말기 암 환자 2명, 파킨슨병 환자 1명, 심장내과 중환자 1명이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날 병원에서 만난 한 말기 암 환자 가족은 “당장 판결 때문에 소송을 검토하지는 않지만 여러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줄 소송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현호 의료전문 변호사는 “매년 무의미한 치료를 받거나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다 사망하는 환자는 최소 10만 명”이라고 추정했다.

▽존엄사 확대 해석은 안 돼=이번 법원 판결은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존엄사가 회복 가능성이 없어 치료가 무의미한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 스스로 치료 중단을 결정한 환자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을 확실히 밝혔다. 가족들의 판단에 따라 인공호흡기 제거 등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아직 존엄사의 엄격한 기준 등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판결이 혼란을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삶의 가치가 있다 없다 하는 판단을 어느 수준에서, 누가 내릴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 법적 합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주무부처인 보건복지가족부는 존엄사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와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사회적 합의가 된다면 이르면 내년부터 존엄사의 구체적인 내용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법원 ‘존엄死’ 첫 인정

세브란스 항소여부 곧 결정

의학적으로 생명 연장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12부(부장판사 김천수)는 28일 식물인간 상태인 김모(76·여) 씨와 가족들이 김 씨에 대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서울 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김 씨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김 씨는 고령으로 식물인간 상태 발생 후 8개월이 지나도 의학적인 개선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환자의 기대 생존기간이 3, 4개월에 불과해 인공호흡기 부착의 치료행위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된다”며 “김 씨는 평소 자연스러운 사망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바 있어 피고 세브란스병원은 김 씨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또 재판부는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10조에는 환자가 자신의 생명과 신체의 기능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며 “인공호흡기 치료가 의학적으로 무의미하고 환자의 치료중단 의사가 추정되는 경우,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생명유지보다 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김 씨는 2월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폐 조직검사를 받던 중 폐 혈관이 터져 뇌가 손상된 뒤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왔으며 가족들은 김 씨와 가족 명의로 5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세브란스병원 측은 “항소 여부는 구체적인 판결문을 받은 후에 결정할 것”이라며 “그러나 생명을 존중하는 기독교 기관인 데다 함부로 호흡기를 제거할 경우 종교 및 인권단체의 반발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항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은 판결문을 넘겨받는 대로 병원 내 윤리위원회, 담당 주치의, 변호사 등으로 팀을 구성해 항소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적극적 안락사

환자의 자살을 돕기 위해 치사량의 독극물 모르핀 등을 주입하는 것.

::소극적 안락사(존엄사)

환자가 내린 결정에 따라 인공호흡기 등 생명연장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해외선 인정 추세

루게릭병 환자에 독극물 주입 사망

美 ‘죽음의 의사’ 10~25년 징역형

오리건주선 매년 16~42명 존엄사

해외에서 존엄사 논쟁은 1973년 미국 뉴저지 주의 ‘퀸란 사건’에서 시작됐다.

당시 21세의 여성이었던 캐런 퀸란 씨는 약물중독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후 식물인간이 됐으며 그의 아버지는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존엄사 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 대법원이 아버지의 주장을 받아들이며 존엄사를 인정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1998년 미시간 주의 잭 케보키언 박사는 루게릭병 환자에게 치사량의 독극물을 주입해 사망케 했다. 나중에 그가 100명이 넘는 환자의 자살을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죽음의 의사’로 불렸다. 그는 10∼2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지난해 석방됐다.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는 소극적 안락사를 많이 인정하는 추세다. 특히 네덜란드는 엄격한 요건을 전제로 존엄사를 인정하고 있으며 2000년 11월에는 세계 최초로 불치병 환자에 대해서도 존엄사를 인정했다.

호주는 1996년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했다가 6개월 만에 폐기했으며 현재는 3개 주(州)에서만 허용하고 있다. 영국은 1993년, 일본은 1996년 법원 판결 이후 소극적 안락사에 대해 관용적인 분위기다.

미국은 주별로 다르다. 오리건 주가 1997년 10월 주민투표로 존엄사법을 인정한 대표적인 지역이다. 오리건 주에서는 1998년 이후 매년 16∼42명이 이 법에 따라 존엄사를 택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국내선 엄격 제한

스스로 호흡못해 보조장치 단 환자

아내 강력요구 퇴원 → 곧바로 사망

보라매병원 의사 살인방조죄 집유

국내에서 안락사 논쟁이 본격화한 것은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 때부터다.

김모 씨는 1997년 말 술에 취해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고 서울 보라매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김 씨는 의식은 회복됐지만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어 보조장치를 달고 치료를 받았다.

김 씨의 아내는 치료비가 없다며 남편을 퇴원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의사들은 “퇴원하면 호흡이 어려워져 사망할 것”이라며 말렸지만 김 씨 아내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간 김 씨는 호흡보조장치를 제거한 뒤 숨졌고, 김 씨 아내와 의사들은 살인죄로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김 씨는 물론 의사들에게도 살인죄를 인정해 실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의사들의 죄명을 살인방조죄로 바꿔 형량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으로 낮추었고, 이 판결은 2004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치료행위 중지는 환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말기상태에서 스스로 오직 생명을 연장하는 의미밖에 없는 치료를 그만하자고 요구하고, 의사가 이에 응해 양심에 따라 결정할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환자의 의사 표현이 없는 상황에서 경제적 이유로 퇴원을 요구했고 김 씨의 상태도 나아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존엄사 판결 사건과는 차이가 있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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