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교시 국어시간이 끝나자마자 반 아이들이 복도로 달려 나갔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먼저 앞줄에 서려고 밀치고 당기며 실랑이를 벌였다. 급식을 앞두고 매번 벌어지는 풍경이다. 이날 맨 앞줄에 선 학생은 김춘엽(59·여) 씨.
얼핏 보면 교장선생님인 것 같지만 김 씨는 어엿한 '6학년 여학생'이다. 김 씨는 "여자와 남자가 따로 줄을 서는데 같은 반 여학생들이 나 때문에 늦는다고 핀잔을 줘 오늘은 재빨리 뛰어 나왔다"며 웃었다.
●44년 만에 다시 다니는 초등학교
김 씨는 15명의 반 아이들과 46년이나 차이가 난다. 담임인 김용택(24) 교사의 어머니뻘이다. 아이들과 담임교사는 김 씨를 '춘'이라고 부른다. 김 씨가 처음 자기소개를 할 때 이름 가운데 자를 따서 '춘'으로 불러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44년 만에 이 학교 6학년을 다시 다니고 있다. 사연은 기구하다. 강진군 도암면이 고향인 김 씨는 1964년 졸업을 이틀 앞두고 제적을 당했다. 20여 일 무단결석을 했다는 이유였다. 당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오빠와 어렵게 살아가던 김 씨는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초등학교 중퇴라는 학력을 숨긴 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김 씨는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김 씨가 고향을 다시 찾은 것은 지난해 9월. 배움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남편과 함께 모교를 찾아간 그는 다시 입학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김내학(61) 교장은 "처음에는 농담인줄 알았다"며 "부부가 하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전남도교육청에 입학이 가능한지를 문의한 뒤 재입학을 허용했다"고 말했다.
●반 친구들과 딱지 치는 59세 여학생
44년 만의 학교생활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 아이들이 '웬 할머니가 왔느냐'며 수군거리더군요. 아 이게 바로 '왕따'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기로 했죠."
김 씨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딱지치기를 배웠다. 문방구에서 딱지를 사 집에서 혼자 연습한 뒤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놀이를 하며 가까워졌다.
김 씨는 "처음에는 많이 잃었지만 지금은 실력을 쌓아 우리 반에서 딱지가 가장 많다"며 책가방에서 딱지를 꺼내 보여줬다.
여학생들과는 피구나 공기놀이를 하며 어울렸다. 최가영(13) 양은 "9월에 반장선거 때 춘을 추천했는데 여학생들이 똘똘 뭉쳐 당선시켰다"며 "마음씨가 너무 좋고 사탕을 자주 줘 '사탕공주'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담임인 김 교사는 이 학교가 첫 발령지인 새내기 교사다. 6월 김 씨가 입학했을 때 김 교사는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김 교사는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을 원치 않고 청소나 봉사활동도 아이들과 똑같이 한다"며 "미국에서 오래 사셔서 영어 발음이 좋아 솔직히 영어수업 만큼은 부담스럽다"며 웃었다.
●대학 진학해서 작가가 되는 게 꿈
7개월의 짧은 학교생활 동안 김 씨는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여러 차례 진한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언젠가 같은 반 남자아이가 김 씨 대신 벌을 서준 일도 있었다. 국어 교과서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 아이가 선생님 몰래 자기 책을 김 씨에게 주면서 조용히 교실 뒤로 나가 벌을 선 것.
김 씨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고마웠다"며 "지금은 그 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고 말했다.
속상한 일도 있었다. 강진읍에서 15분 거리인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는 김 씨는 초등학생 표를 끊었다가 운전사가 "왜 어른이 초등생 표를 내느냐"며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다시 어른 표를 사서 학교에 등교한 김 씨는 너무 억울해 교실에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눈물을 쏟았다. 이 사실을 안 김 교사가 버스회사에 항의를 해 공식 사과를 받아냈다.
김 씨는 졸업 후 강진읍에 있는 강진여중에 진학할 예정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입게 될 교복도 골라 놨다.
"나이가 있으니 중학교를 다니면서 검정고시를 보려고 해요.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대학가서 배움을 더 쌓아 어릴 적 꿈꾼 작가가 되고 싶어요." 쉰아홉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의 소박한 꿈이다.
강진=정승호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