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에 새겨진 이름들 아무도 눈길 안던져
하극상을 통해 5, 6공화국을 탄생시킨 12·12쿠데타 29주년을 맞아 얼마 전 경북 경산시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실감한 일이 떠오른다. 제행무상, ‘우주 만물은 항상 유전(流轉)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갓바위 부처가 있는 해발 850m의 관봉(冠峯) 정상에는 순례객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갓바위 부처님의 영험 때문이다. 관리사찰인 선본사 측의 양해를 구해 부처님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화강암 바위에 올랐다.
바위 정상을 향해 오르는 순간, 후미진 한구석에 다듬어진 돌덩어리들이 버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북 모양 석상(石像)으로 가운데에는 홈이 파여 있었다. 여기에는 ‘전임 대통령 신미생 전두환 영부인 기묘생 이순자’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6공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 씨의 이름이 새겨진 돌 조각도 구석에 뒹굴고 있었다.
사찰 관계자에 따르면 거북 모양 조각품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시주한 석등(石燈)의 하단으로 5, 6공 시절 갓바위 앞에 세워져 있던 두 기(基) 중 일부. 박 철언 씨도 이 무렵 돌 조각을 시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되고 조계종 종단 권력도 부침을 거듭하는 사이, 이들이 시주한 석물(石物)은 누군가에 의해 후미진 곳으로 내쳐졌다. 불교 관계자들은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국보위 시절 신군부 세력이 불교를 탄압한 ‘법난(法難)’의 악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선본사 경내에도 전두환 노태우 씨가 시주한 범종과 시주자 명단이 적힌 방명록 비석이 있다. 범종각 오른쪽의 비석에는 전두환 이순자 전재국 전재용 전재만 전효선 전수현 전기환 전경환 씨 등 5공의 일가 친척들이, 왼쪽 비석에는 노태우 김옥숙 노재현 최태원 노소영 김복동 금진호 박철언 현경자 씨 등 알 만한 6공 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 비석을 주목하지 않는다.
범종이 조성된 시기는 불기 2533년, 즉 서기 1989년 음력 3월. 당시 조계종 고위 관계자는 “5, 6공 세력이 대구 경북 지역 유지들의 시주를 받아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 대형 약사여래불을 조성하면서 그중 일부를 사용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선본사와 갓바위 불사(佛事)를 지휘한 사람은 동화사 출신으로 조계종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서의현 당시 총무원장. 의현 총무원장은 1994년 종단 정화(淨化) 세력에 밀려나 승려 신분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현재도 상좌와의 법정 분쟁으로 곤혹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 대통령을 ‘귀양’ 보냈던 노 대통령도 몇 년째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투병 중이다. 제행무상. 나무아미타불.
경산=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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