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문학, 왜 연군만 있고 반발은 없을까
○ 생각의 시작
유배는 대개 정치집단 사이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비롯된 범죄에 대해 군왕이 관료층에 내리는 형벌의 일종이었다. 유배형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된 유배문학은 군왕에 대한 한결같은 충절 의식을 담고 있다.
『내 임을 그리워하여 우노니
산 접동새와 난 비슷합니다.
임이 나를 벌써 잊으셨을까요?
아! 임이시여 다시 들으시고 사랑해주소서.
-정서(鄭敍), ‘정과정곡(鄭瓜亭曲)’에서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져근덧 생각 말고 이 시름 잊자 하니, 마음에 맺혀 있어 골수(骨髓)에 사무쳤으니 편작(扁鵲)이 열이 오나 이 병을 어찌 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안니다가, 향 묻은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
-정철, ‘사미인곡(思美人曲)’에서』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사랑하는 임과 이별한 여인’의 애달픈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군신(君臣) 간의 정치적 관계를 남녀의 애정관계로 미화함으로써 임금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왜 이런 의식이 흘러넘치는 것일까?
○ 충절의식의 바탕에 있는 정신세계①: 유학이념
『조선조 유배가사의 작가들은 당쟁의 와중에서 충(忠)을 지고의 이념으로 여겨왔던 유학자들이었다. 신하로서 군왕에게 충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유배지에서도 유배가사를 통하여 연군, 우국, 진충(盡忠)의 충절의식을 투영하였다. 유배생활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자구마다 군왕의 은혜를 생각하며 유배가사를 창작하였음을 볼 때 그들의 사고에 유학이념의 충절의식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주곤, ‘유배가사에 나타난 충절의식의 양상’』
위 글은 조선조 가사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충절의식의 뿌리를 사대부들이 숭상하는 유학 이념에서 찾고 있다. 사대부들에게 있어 유학은 군왕에 대한 충절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게 하는 강한 이념적 명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 충절의식의 바탕에 있는 정신세계②: 임금에 대한 원망
유배는 군왕을 둘러싼 권력투쟁 과정에서 파생되는 ‘정치적 보복행위’의 일종이다. 따라서, 권력에서 밀려난 안타까움, 반대파에 대한 분노―혹은 임금에 대한 원망―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의 작품에는 ‘만분가’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유배를 당하게 된 현실에 대한 억울한 심정의 일단이 나타나 있다.
『노(魯)나라 흐린 술에 한단(邯鄲)이 무슨 죄(罪)며 / 진인(秦人)이 취(醉)한 잔(盞)의 월인(越人)이 무슨 탓인가 / 성문(城門) 모진 불의 옥석(玉石)이 함께 타니 / 뜰 앞에 심은 난(蘭)이 반(半)이나 시들었구나.
-조위, ‘만분가(萬憤歌)’에서』
○ 충절의식의 바탕에 있는 정신세계③: 임금에 대한 소망과 애소
윤선도가 경원 유배지에서 지은 작품으로, 임금이 자신에 대한 참소의 말을 듣지 말고 진실을 옳게 판단하여 달라는 은근한 소망과 애소를 담고 있다.
『내 일 망령된 줄 내라 하여 모를 손가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탓이로세
누가 아무리 일러도 임이 헤아려 보소서
-윤선도, ‘견회요(遣懷謠)’』
○ 결론을 말하자면
충절의 대상인 군왕은 왕조국가에서 절대 권력자였고, 유배를 당한 자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왕권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유배문학도 왕권에 도전하는 내용은 없다. 유배문학에 나타나는 군왕에 대한 충절의식의 바탕에는 왕의 은총을 회복하고자 하는 은근한 의도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전문규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