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면사무소라도 있어야 그 주변에 몇몇 가게가 들어서는 게 일반적인 시골 풍경. 하지만 경기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는 관공서도, 유명 맛집도 없는데 상가 거리가 200여 m에 이른다. 택지지구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 유독 이 마을에는 여관이며 술집으로 쓰였던 형태의 상가가 즐비하게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다방 마담은 중국동포로 바뀌어
13일 오후 가게 밖으로 뻗어 나온 연탄난로 연통은 느릿느릿 연기를 뿜어냈다. 가게 주인은 40여 년 동안 이발사로 일한 김희춘(71) 씨. ‘약장’이라고 쓰인 투명 플라스틱 장 안에 가위와 수동 이발기 ‘바리캉’, 빗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원래는 화초에 물 줄 때 쓰는 소형 플라스틱 물뿌리개도 이발 뒤 머리 감기용으로 여전히 쓰이고 있었다.
건너편의 ‘대흥상회’는 이름만 봐서는 뭘 파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지금은 사라진 석유 풍로의 심지, 군용 양말, 파리 끈끈이, 군 전역자 기념품 등이 진열돼 있다. 군인들이 위장망을 설치할 때 사용하는 줄과 군용 양말, 군대에서 쓰던 ‘인삼비누’, 구두약 등등. 하지만 이 물건을 찾는 손님은 거의 없다.
주인 김민자(64) 씨는 “매일 군인들이 찾아와 부대에서 쓸 물건을 사가느라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었다”며 “미군이 떠난 이후 한국군 부대도 이전해 가면서 1970년대 이후 그 모습이 변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마당을 한가운데 놓고 ‘ㄷ’자 모양으로 방이 배치되어 있는 옛날 여관도 그 모습 그대로다. 영업은 하지 않지만 입구에는 ‘실종 어린이’ ‘수배자’ 전단이 붙어 있고 공동화장실 화살표도 그대로다.
다방에선 마을 노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커피가 2000원에 팔리고 있다. 도라지 위스키를 내놓던 멋스러운 마담 대신 한국말 서툰 중국동포가 노인들에게 정성껏 커피를 타주는 것이 세월에 따른 변화의 모습이다.
○미군 떠나니 조용필도 떠나고…
가수 조용필도 무명시절 이 마을의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한 주민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는 서울 명동보다 이 동네 돈벌이가 낫다고들 했지. 나도 이 마을에 들어와 임차로 시작해 가게를 사고, 재산을 두 배로 늘려 집도 샀지.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허허.”
1970년대 중반 주한미군 철수가 시작되면서 이 마을은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군도 마을에서 먼 곳으로 옮겨가 경기가 되살아날 불씨는 완전히 꺼져 버렸다. 열창하던 조용필의 모습도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큰돈을 벌어 가게를 늘리고 집을 마련한 주민들은 쉽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한 채 이곳에 터를 잡고 지금껏 살아왔다. 그 덕분에 상가들은 1960, 70년대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하게 됐고 지금도 일부 가게는 영업을 하고 있다.
물론 주민들은 당시를 그리워하면서도 기지촌 이미지를 깨끗하게 지우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심정이 반영되어서인지 파주시는 올해 이 마을 상가 간판 정비사업을 벌여 현대식 디자인으로 ‘말끔하게’ 교체했다.
추억에 잠긴 주민들과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한 가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현대식 간판의 유일한 흠이었다.
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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