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26일 오전 11시. 서울 광진구 중곡동 대원외고 대강당에 초등학교 6학년 학생 317명이 부모의 손을 잡은 채 연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한 명씩 차례로 연단에 올라간 아이들은 하얀색 상자에서 탁구공 하나씩을 꺼냈다.
고사리 같은 손에 흰색이나 귤색 또는 녹색 공을 한 개씩 쥔 아이들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한 아이는 “면접 때는 하나도 안 떨렸는데 지금은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요”라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모든 아이가 공을 뽑은 뒤 마지막으로 대원중 김일형 교장이 연단에 올라갔다.
김 교장은 “내가 여러분이 들고 있지 않은 색깔을 고른다고 원망하지 않을 거죠?”라며 몇 번이나 되물었다. 마침내 김 교장이 상자에 손을 넣어 합격자를 결정할 공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공은 귤색이었다.
귤색 공을 쥔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흰색과 녹색 공을 쥔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서는 긴 탄식이 터져 나왔다. “흰색과 녹색 공을 선택한 친구들은 이제 나가주세요”라는 김 교장의 말에 흰색과 녹색 공을 쥔 학생들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힘없이 강당을 빠져나갔다.
끝내 울음을 터뜨린 아이들도 있었다. 한 아버지는 우는 자녀에게 “그냥 이번엔 줄을 잘못 선 것뿐이야. 인생이 원래 그래”라며 등을 토닥였지만 아이는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녹색 공을 쥐고 있던 한 학생은 “공이 손에서 떨어지면 추첨에서 떨어질 것 같아서, 일부러 꼭 쥐고 있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또 다른 학생은 “친구하고 똑같은 색깔을 뽑아서 같이 학교에 다니자고 약속하고 올라갔어요. 색깔이 다를 때부터 불안했어요”라며 “추첨으로 당락이 갈리는 건 너무 억울해요”라고 말했다.
내년부터 국제중으로 전환하는 대원중 3차 전형 공개추첨은 이렇게 1시간 반 만에 끝났다. 추첨 전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서약서를 써냈지만 탈락한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아쉬움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탈락한 한 아이의 아버지는 학교를 빠져나오자마자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나는 남을 편하게 하는 사람인가’라는 글이 적힌 교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진보 운동단체들이 국제중을 ‘귀족학교’로 몰아세우고 평등성만 요구하니까 학교도 어쩔 수 없이 추첨제를 택한 것이다. 이래서야 다양한 특성화 학교가 나오겠느냐.”
같은 시간 학교 앞에서는 한 사교육업체가 탈락한 아이들에게 중국 Z국제중 입학 안내 책자를 나눠주고 있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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