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인간이 주체로 살 수 있는 길은?

  • 입력 2008년 12월 29일 02시 58분


‘기계 왕국’ 현대문명… 인간이 주체로 살 수 있는 길은?

산에 오르는 도중 한 짬이라도 쉴라치면 우리는 올라온 만큼과 남은 거리를 재어본다. 상인들도 판 물건과 팔지 못한 물건을 따져 오늘의 손익을 계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식이 가치의 원천인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의 저자 대니얼 J 부어스틴은 인류가 발견해 온 지식의 대차대조표를 통해 현대 문명을 평가하고 인간 지성의 로드맵을 그려준다. 사람들은 흔히 발전이란 건설적인 발명과 발견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어스틴은 ‘부정적 발견’의 가치를 내세우며 첫 운을 뗀다. 부정적 가치, 바로 ‘아님(없음)’을 발견하는 일의 중요성을 일컫는 말이다.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신이 창조한 완벽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근대 천문학의 성과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태양도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그리고 우리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님을 깨닫게 해줬다. ‘아님’의 발견이 과학의 거대한 전환을 이뤄낸 것이다.

근대 이후의 지식 팽창은 이처럼 허탈하면서도 유쾌하지 않을 듯한 증명들 덕분에 비로소 기지개를 켰다. 역사적 환상이 해체되었을 때 직접 탐구하고 발견하려는 인류의 열정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부어스틴은 모름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는 일은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 무지를 자각하라던 소크라테스의 일갈과도 상통한다. 그는 현대 문명을 ‘기계왕국’이라 진단하며 독창적인 사유를 펼친다.

우선 자연의 두 영역인 ‘동물과 식물의 왕국’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하는 세계이다. ‘광물의 왕국’은 근대 화학과 물리학의 발전으로 비밀이 밝혀진 무생물의 세계이다. 이 둘은 모두 신이 창조한 자연의 섭리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기계왕국은 정반대다.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돌연변이 왕국이다. 인간의 피조물이면서도 정복할 수 없는 힘을 가진 프랑켄슈타인의 현신인 셈이다.

기계왕국의 모든 원동력은 기계 자체에서 나온다. 기계는 스스로 번식하며 소멸하지 않는다. 자동차 때문에 주차 차고, 신용카드, 쇼핑센터, 오염측정기가 등장했지만 정작 자전거를 없애지는 못했다. 기계는 또한 스스로 이종 교배한다. 컴퓨터와 전화기, 사진기가 조그마한 휴대전화기 안으로 빨려드는 속도를 생각해 보라.

기계는 인간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해를 보며 생활하던 인간에게 시계가 등장함에 따라 시간 엄수는 윤리의 핵심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기계는 점점 인간 정신의 주체가 되고 있으며, 반대로 기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수준은 낮아져만 간다.

기계왕국의 최고 모범 시민은 누구일까. 부어스틴이 1위로 꼽은 사람은 바로 토머스 에디슨이다. 에디슨은 실용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발명하기 위해 도전했다. 전기, 영사기, 타자기, 축음기 등 온갖 분야에서 1093개의 특허를 받았다.

자연의 근본 원리를 파악하려 했던 뉴턴과는 달리 에디슨은 지식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장에서 팔 수 있는 것’과 ‘실용적인 것’이 그가 쉼 없이 추구한 가치이다.

그렇다면 기계 왕국의 메커니즘에 갇힌 우리가 어떻게 주체로 되살아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유롭게 방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강고한 상식에 균열을 내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부정의 가치를 위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