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모르던 울산 등 車-조선 하청업체 실직자 쏟아져
“재취업 위해 이력서 100여곳 냈지만 1곳도 합격 못해”
대졸자 취업시장 뛰어드는 3월 고용대란 본격화 우려
취재팀이 방문한 고용지원센터 14곳의 분위기는 지역에 따라 확연하게 달랐다.
서울에서는 실직자들의 연령이 20대부터 50대까지 고루 퍼져 있고 종사하던 분야도 다양했다. 경기침체의 타격을 많이 받는 제조업 분야의 하청업체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으로 보인다. 식당 종업원이나 경비직 같은 단순 직종은 물론 여행사 잡지사 인쇄업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고용지원센터를 찾았다.
지방은 중소 제조업체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중장년층이 대거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자동차와 조선, 건설업계의 일감이 크게 줄면서 2, 3차 하청업체들이 잇달아 폐업이나 구조조정에 들어간 탓이다. 지방경제가 워낙 나빠서인지 지방 실직자들은 재취업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주위에서 공장들이 줄도산하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 자동차 조선 하청업체 ‘줄도산’
경남 창원시 창원국가산업단지에서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A사 공장. 낮 시간인데도 사무실과 복도의 전등이 꺼져 있다. 회사 내 한쪽에는 노조에서 내건 ‘구조조정 철회하라’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인근에서 만난 김대현(59) 씨는 한 달 전에 실직한 뒤 일자리를 구하러 공장이 많은 창원까지 왔지만 여전히 실업자 신세다. 김 씨는 지난해 말까지는 경남 거제시 삼성중공업 협력업체에서 용접과 크레인 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2007년에 은퇴했지만 대학을 졸업한 자녀 둘이 모두 취업에 실패해 작년 1월에 다시 현장으로 나왔다.
김 씨는 “작년 말부터 삼성중공업의 100여 개 협력업체에서 근무하던 비정규직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었다”며 “동료들과 창원에 일자리를 찾으러 왔지만 이곳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푸념했다.
창원종합고용지원센터 천종성 기업지원팀장은 “불황을 모르던 창원도 최근 볼보건설기계와 쌍용자동차 등의 생산량이 크게 줄면서 부품 하청업체 직원들이 잇달아 해고되고 있다”며 “이로 인해 지역사회의 시름이 깊다”고 말했다.
전남 목포시에 있는 원당중공업의 한 외주업체에서 일하던 김보현(36) 씨. 선박에 페인트칠을 하던 그는 작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한 달에 평균 25일씩 일했지만 작년 12월에 회사가 파산하면서 실업자가 됐다. 김 씨는 “11월부터 갑자기 일감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1억5000만 원에 이르던 월 매출이 절반으로 줄면서 결국 회사가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용직 근로자들의 수입도 크게 줄었다.
인천 중구 인천항만단지에서 일용직으로 하역 작업을 하는 정덕이(45) 씨는 지난해 11월부터 한 달에 일하는 날이 10일도 채 안 됐다. 수출입 물량이 크게 줄어든 탓이다. 월평균 170만 원을 벌었지만 11월에는 80만 원만 집에 가져갔다.
정 씨는 “이달에는 70만 원도 받기 힘들 것 같다”며 “다음 달에 중국의 설 연휴가 시작되면 무역량이 더 줄어들게 뻔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주로 일하던 임모(58) 씨도 지난해 12월 초부터는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임 씨는 “요즘에는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도 일자리를 잡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전했다.
○ 고용지원센터는 실직자로 붐비고…
‘삐, 삐….’
12일 오전 울산 남구 삼산동 울산종합고용지원센터. 건물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2대에서는 인원 초과를 알리는 경고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몇몇 사람은 눈살을 찌푸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비상계단 쪽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들이 몰려든 곳은 실업급여 신청자를 대상으로 열리는 수급 설명회. 울산센터는 이날부터 설명회 장소를 10층의 작은 강의실에서 9층의 대강당으로 옮겼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설명회에 참석하려는 사람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오후 광주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도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모여든 사람으로 북적였다. 한 상담원은 신청자들의 인적사항을 입력하면서 연방 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를 받느라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이곳에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온 권모(50) 씨는 지난해 말까지 자동차 부품을 만들어 외국으로 수출하는 회사에 다녔다. 그는 “내가 다니던 회사도 최근 비정규직 직원 1000여 명 중 70%가량을 해고했다”며 “8년 동안 같은 회사에 다녔지만 이번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광주지방노동청 노사지원과 관계자는 “제조업체가 몰려 있는 광주 하남공단 내의 자동차 관련업체 300여 곳이 휴업이나 폐업을 하면서 실업급여 신청자가 폭증했다”고 전했다.
같은 날 재취업 교육을 받으러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남부종합고용지원센터를 방문한 권방현(29) 씨는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이력서를 낸 회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못 받을까 봐 불안해서”라고 했다.
권 씨는 6개월 동안 100여 곳의 업체에 이력서를 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은 2곳이었지만 합격된 곳은 없다. 누나 집에서 생활하면서 낮에는 틈틈이 편의점과 제과점 근무, 우편물 물류 발송 같은 아르바이트를 한다. 밤에는 인터넷으로 취업 정보를 검색한다.
그는 “휴대전화에 알 수 없는 번호가 찍혀 전화를 걸었더니 한 번에 3만 원씩 빠져나가는 사기였다”면서도 “그래도 혹시 좋은 소식이 들려올까 싶어 자꾸 전화기에 눈이 간다”고 말했다.
○ 고용시장에 몰려오는 삼각파도
13일 자동차 부품업체가 몰려 있는 경기 안산시 반월시화공단의 한 업체. 부품 원자재와 완성품이 쌓여 있어야 할 공장 앞에는 빈 수레가 가득했다.
자동차 제어장치를 생산하는 한 업체의 간부는 “일감이 없어 기계를 세워야 할 판”이라며 “직원들을 곧바로 해고할 수는 없어 노동부에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안산고용지원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1∼10월에는 고용유지지원금 요청이 한 달 평균 20∼30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11월에 225건으로 늘더니 12월에는 1171건까지 치솟았다.
고용유지지원금을 받고 있는 대구 성서공단 내 대호정밀의 사장은 “회사도 근로자 임금의 일정 부분을 부담해야 하는 만큼 상황이 더 나빠지면 정부 지원금만으론 버티기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노동시장 전문가들은 대졸자들이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올해 3월부터 본격적인 ‘일자리 대란(大亂)’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고용시장은 신규 취업자들을 흡수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기술교육대 유길상(경제학) 교수는 “최근의 고용시장은 외환위기 이후 지속되고 있는 청장년층의 구조적인 실업과 경기침체에 따른 구조조정 여파, 대졸자들이 올해 3월부터 취업시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계절적 실업이 더해지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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