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年600여건 중복논문 의심”

  • 입력 2009년 1월 30일 03시 01분


베끼고… 쪼개고… 붙이고… 의료계, 이중게재 논문 잇단 자진취소

샘플 수만 바꾸거나 국내발표후 해외저널 게재

‘황우석 사태’ 이후에도 법적 처벌 규정은 없어

‘살라미는 북한의 전유물이 아니다. 의료계에도 살라미가 있다.’

살라미(salami)는 북한의 상투적인 협상 전술. 미국과 핵 협상을 하거나 남북회담 때 요구사항을 하나씩 쪼개 단계적으로 목적을 달성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이 의료계에서는 이중 게재 논문의 한 종류로, 하나의 표본 집단으로 여러 개의 논문을 만들어내는 ‘논문 쪼개기’ 수단으로 통한다.

▽이중 게재 의심 논문, 매년 600건 이상 추정=지난해 한림대 의대 강동성심병원 가정의학과 김수영 교수팀은 2004년 국내 의학술지 검색사이트(KoreaMed)에 발표된 의학논문을 국외 의학논문 검색사이트(PubMed, Google scholar, KMBase)와 비교했다. 그 결과 이중 게재 논문이 6%를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 교수팀이 ‘KoreaMed’에 발표된 9030편의 논문 중 5%인 455편을 무작위로 선정해 조사했는데 이 중 29편(6.3%)의 논문이 이중 게재로 최종 판명된 것이다.

김 교수는 “지난해 본(本)조사 전 예비조사에서는 2004년 발표된 85개의 논문 중 9개 논문(10%)이 이중 게재로 추정됐다”며 “미국 등 외국의 경우 논문 이중 게재가 2%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3배 이상 높은 수치”라고 말했다.

매년 국내에서 발표되는 논문은 평균 1만여 건. 결국 매년 600∼1000건은 중복 논문으로 의심되는 셈이다.

논문의 이중 게재 유형은 3가지로 △두 논문 간에 표본도 같고 결과도 같은 복제(copy) △표본은 같지만 쪼개기를 통해 여러 개의 논문을 만드는 ‘살라미’ △‘살라미’ 논문을 합쳐서 또 다른 논문을 쓰는 ‘이말라스(imalas·salami를 거꾸로 쓴 말·논문 덧붙이기)’ 등이다.

김 교수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중 게재로 판명된 논문 중 복제가 13건(44.8%)으로 가장 많았고 이말라스가 6건(20.7%), 살라미가 4건(13.8%)이었다.

또 2004년 이중 게재 논문의 경우 국내에서 발표한 뒤 또 다른 국내 학회에 발표한 경우가 48.3%로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 국내에서 발표한 뒤 비슷한 내용의 논문을 해외에 발표한 것도 44.8%나 됐다.

▽국내 논문 검증=2000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의료계에서 이중 논문 게재는 공공연한 관행으로 받아들여져 윤리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의료원장인 A 교수는 “1990년 국내에서 학회를 처음 만든 뒤 학회지에 실릴 논문 편수를 채우기 위해 해외에 발표할 논문을 미리 국내 학회지에 게재하도록 종용했다”며 “어쩔 수 없이 논문을 이중으로 실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의료계의 한 관계자는 “1990년대만 해도 연구비용과 연구 인력이 부족해 제대로 논문을 쓰는 것이 불가능했다”며 “이 때문에 외국 논문을 그대로 베껴 쓰거나 국내에서 발표된 논문을 영문으로 옮겨서 발표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5년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 이후에 연구윤리 기구나 규정이 만들어지면서 표절 논문이나 중복 논문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현재 국내에서 이중 게재 논문 검증은 학회나 전문가가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의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과 ‘국가연구업적통합정보(KRI)’를 이용해 하고 있다.

그러나 이중 게재 논문이 적발돼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없다.

학진 관계자는 “외국에도 특별한 논문 검증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다만 어렸을 때부터 연구 윤리나 표절에 대한 교육이 철저히 이뤄졌기 때문에 논문 이중 게재 문제가 커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가운데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는 지난해 ‘의학논문출판윤리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국내외 논문의 이중 게재 문제점과 저자들이 주의할 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중 게재는 ‘이미 출판된 논문과 상당부분(considerable parts) 겹치는 내용을 다시 출판하는 경우’다. 또 이중 게재 판정 기준은 △가설이 유사하다 △숫자나 표본 크기가 유사하다 △연구 방법이 동일하거나 비슷하다 △결과가 유사하다 △최소한 저자 1명이 공통이다 △새로운 정보가 없거나 적다 등이다.

김 교수는 “현재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 차원에서 2005년 논문 7533건 중 377건을 무작위로 선정한 뒤 3명의 출판윤리 전문가가 초록 또는 전문을 검토해 이중 게재가 어느 정도 되는지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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