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모든 게 현실로 다가오네요.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백하겠습니다.”
30일 오전 2시. 연쇄살인사건 피의자 강호순 씨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가 있느냐. 있으면 가져와 보라”며 닷새 동안 경찰들을 농락하던 거만한 말투가 아니었다.
“한 형사님을 불러주세요.”
강 씨는 조사과정에서 말이 잘 통했던 한춘식(40) 경사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경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소속인 한 경사는 강 씨를 직접 붙잡은 형사다. 범죄자들은 보통 자신을 검거한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낀다고 한다.
경찰은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압박하고 다른 팀은 부드럽게 설득하는 방식으로 조사했는데 한 경사는 후자였다.
한 경사가 마주 앉자 강 씨는 지난해 11월 경기 수원시 당수동에서 실종된 주부 김모(당시 48세) 씨를 살해해 야산에 묻었다고 실토했다. 이후 “모든 범행 증거가 확보돼 있다”는 추궁이 계속되자 강 씨는 나머지 5차례의 범행도 줄줄이 털어놨다.
그는 자백하면서 “답답했는데 이제는 편하다. 가족에게 미안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끝까지 여죄를 부인하며 심리전을 펼치던 강 씨를 체념하게 만든 것은 DNA 검사 결과와 휴대전화 통화 기록 등이 담긴 보고서였다.
강 씨의 트럭에서 압수한 잠바의 혈흔 DNA가 지난해 11월 성폭행당한 뒤 숨진 40대 주부의 것과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감정 결과는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였다.
미제로 남을 뻔했던 경기 군포시 20대 여성 실종사건에서 범인 강 씨의 연쇄 살인행각까지 규명해낸 것은 과학적 토대 위에 저인망식 수사가 결합된 ‘한국형 과학수사’가 이뤄낸 결과다.
경찰은 지난해 12월 군포에서 20대 여성 A 씨 실종사건이 발생하자 피해 여성의 예상 이동로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310대에 찍힌 차량 7200여 대를 일일이 검색해 수사망을 좁혀갔다. 이 과정에서 ‘프로파일러(profiler)’라고 불리는 범죄심리분석관의 역할도 컸다. 이들은 대부분 심리·사회학 전공자들로 범죄자와의 면담을 통해 심리를 읽어내고 자백을 받아내는 전문가들이다. 범죄자의 내면 심리를 통계학적 과학적으로 분석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프로파일러들은 지난해 3월 경기 안양시 초등생 유괴살해사건 때 범인 정모(40) 씨로부터 자백을 이끌어냈고, 2006년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때도 결정적인 자백을 받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과학수사의 기본이자 핵심은 지문과 유전자 분석. 썩은 피부도 뜨거운 물에 3초간 담갔다가 한 꺼풀 벗기면 지문을 확인할 수 있고 DNA의 경우 정액은 물론 머리카락이나 뼈, 땀에서도 검출이 가능하다.
이 같은 과학적 증거들은 혐의를 부인하는 용의자들을 체념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강 씨로부터 자백을 받아낸 한 경찰 관계자는 “네가 벌인 범행을 입증할 과학적 증거를 모두 갖고 있다는 확신을 주자 그때부터 체념하고 그동안의 범행을 술술 자백했다”고 말했다.
안산=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