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출신 여성 작년 총선 비례대표 출마
“다문화가정 현실 우리만큼 아는 사람 있나”
“주변에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말렸지만
계속 도전하면 이주민 의원-대통령 나올 것”
“내가 그래도 당에서 제일 잘나갔어요.”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비례대표 후보 7번이었던 헤르난데스 주디스 알레그레(38·여) 씨는 이민자(移民者)로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받은 사례다.
그는 필리핀에서 태어나 한국 남자와 결혼해 우리나라에 온 지 17년 된 ‘한국인’이다. 다문화가정의 표본으로 영입된 그는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선거마당에 뛰어들었다가 고배를 들긴 했지만 지금도 “한번 시작했는데 끝을 보겠다”고 당차게 말한다.
한국여성정치연구소와 여성부가 지난해 공동으로 시작한 ‘제1호 국제결혼 이주여성 정치인 만들기 프로젝트’(정치인 프로젝트)에 참여한 20여 명의 이주여성도 2010년 지방의원, 아니 그 너머를 향해 희망을 쏘아 올릴 준비를 하고 있다.
○ 나는 오바마가 아니다
케냐인 흑인 아버지와 미국인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입성이 주디스 씨와 같은 이민자들의 정치 진출 가능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높인 것은 사실이다.
실제 주디스 씨 주변에서는 그를 ‘한국의 오바마’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는 각광을 받으려고 정치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17년 동안 다문화가정을 이뤄 살면서 쌓은 경험을 다른 다문화가정 엄마들과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냥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었던 거예요.”
정치판에 뛰어들기 전 그는 다문화가정 관련 행사에 열심이었고, 한국말을 못해 남편과 불화를 겪는 이주여성이나 임금이 체불된 이주노동자를 위해 통역을 자처했다.
정치인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자스민(33·여·필리핀 출신) 씨에게는 또 다른 소박한 목표가 있다.
“아이들이 0.01%라도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엄마의 나라로 아이들을 보낸 가족이 많아요.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스민 씨는 올해 중학생이 되는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딸이 있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은 “이들은 오바마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들이 피부색, 어머니의 출신 국가, 어눌한 한국말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그런 사회를 만들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 정치의식이 자란다
주디스 씨는 지난해 3월 국회 브리핑룸에서 창조한국당 비례대표 후보로 처음 언론에 선을 보였다. 한 기자가 그에게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당황한 그는 대답을 못했다.
그러나 당시를 회상하는 주디스 씨는 당당하다.
“헌법 1조 1항은 일반 사람도 잘 몰라요. (내가) 법은 모르지만 다문화가정이 어떻게 사는지는 다 알아요. 선거운동을 하면서 누군가는 하루하루 어렵게 사는 이주민들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깊어졌어요.”
주디스 씨나 정치인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모국이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하거나 사회주의 국가였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뒤 온 경우도 많아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 출신 안순화(43) 씨는 2005년 국적을 얻고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의회 선거를 모두 치렀지만 자신의 판단으로 투표를 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정치와 거리를 둘 수는 없다는 걸 알았어요. 이제는 스스로 판단해서 투표를 할 생각이에요.”
스리랑카 출신의 이레샤(36·여) 씨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고 했을 때 남편이 “이런 거 안 해도 밥 먹고 살 수 있다”며 마뜩잖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레샤 씨는 “남편에게 ‘밥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며 “우리가 받아만 가는 사람이 아니라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처음에는 ‘이들도 참정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이들의 정치에 대한 열망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내 편견이 깨져 갔다”고 말했다.
○ 도전은 계속된다
주디스 씨는 자신이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는 거예요. 당선이 되든 안 되든 끝까지 해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는 다시 국회의원 후보가 될 기회가 온다면 꼭 잡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먼저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깨닫고 있다.
“정말 법 공부를 하고 싶어요. 지난해 선거가 끝나고 대학을 다니려고 했지만 먹고사는 데 바쁘다 보니…. 나는 안 되도 언젠가 누군가는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고,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측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첫 비례대표 의원을 만드는 것이 최대 목표”라고 말하지만 주디스 씨 등의 현실 인식은 좀 더 엄정하다. 한국 사회가 ‘이주민 정치인’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주디스 씨는 지난해 선거운동 당시 택시를 탔을 때 운전기사들이 “외국인이 무슨 정치냐”고 할 때마다 “저도 한국인이에요”라고 응수하기에 바빴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이 나오기까지 200년이 걸렸다. 하지만 국내 이주여성들은 희망을 안고 있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도전을 거듭하며 자신들의 꿈을 더 크게 키워 나가리라는 것을.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국내체류 결혼이민자 작년 12만2552명
국적취득 조건 깐깐… ‘한표 행사’ 힘들어▼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2008년 말 현재 국내 체류 중인 결혼이민자(국민의 배우자)는 불법 체류자를 포함해서 12만2552명이다. 이 중 여성은 11만3916명으로 전체의 88%를 차지한다.
이들 여성이 모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시 못 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적 취득 기간과 조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1997년까지는 한국인과 결혼만 해도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국적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인과 결혼한 뒤 국내에서 2년 이상 주소를 갖고 있거나,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상태에서 1년 이상 국내에 주소가 있어야만 국적 취득 신청을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결혼이민여성 본인이나 배우자 등 가족이 3000만 원 이상의 생계유지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즉, 3000만 원 이상의 예금잔액 증명이나 이에 해당하는 부동산등기부등본 또는 부동산전세계약서사본 등을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인 남편이 외국인 배우자의 국적 취득을 꺼리는 경우와 이혼한 경우다.
외국인 아내가 국적을 취득하면 곁을 떠날 것이라고 걱정하는 한국인 남편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결혼한 지 2년이 안 된 결혼이민여성의 외국인등록증 갱신에는 남편의 보증이 필요하다. 남편의 결정이 국적 취득에 절대적인 요건인 셈이다.
‘제1호 국제결혼 이주여성 정치인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결혼이민여성들은 “왜 우리가 아이를 낳고 버리고 갈 거라고 생각하느냐. 우리도 엄마다. 편견을 버려 달라”고 입을 모은다.
또 국적을 취득하기 전에 이혼을 한 결혼이민여성은 가정폭력 등 이혼 사유가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국적 취득 신청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 강제 퇴거 당할 수도 있다.
국적 취득 요건을 다 갖췄다 해도 국적을 최종적으로 받기까지는 최대 2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마지막 난관이 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신청 서류 및 현장조사와 법무부 국적난민과의 검토 및 심사에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국적 취득 신청자 수는 증가하는데 이를 처리하는 인원은 턱없이 모자란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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