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회아비’는 이슬람 상인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 가니/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이 말이 상점 밖에 나면/조그만 새끼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고려 말 왕가의 사랑과 질투, 배신을 그린 영화 ‘쌍화점’으로 더 잘 알려진 고려가요 ‘쌍화점’. 고려시대 이슬람 상인(회회아비)과 고려 여인 간 스캔들을 표현한 작품이다.
민간에서 널리 부르던 노래에 이슬람이 등장할 만큼 고려시대 이슬람은 낯설기만 한 이방인이 아니었다.
고려시대 무역항인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는 이슬람 지역을 비롯해 각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북적이는 국제 무역도시였다. 이슬람인들은 고려의 수도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고유 의상과 언어, 문화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이슬람 사원도 건축했다.
이들이 가져온 수은과 몰약 등은 진기한 공물로 대접받았다. 고려 사람들은 연등회나 팔관회 등 불교 행사에도 공식적으로 이들을 초대할 정도로 잘 대우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랍인들의 도래는 이뿐이 아니다. 8세기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북 경주 괘릉 앞에 세워진 8척 무인상은 영락없이 서역 아랍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까무잡잡한 피부, 복슬복슬한 수염과 부리부리한 눈, 우람한 체격 등. 당시 신라에 들어왔던 서역인들이 무시무시한 외모로 무덤을 지켜주길 기대했던 신라인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도 신라 왕실에서 일했던 서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이렇게 무슬림들은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크고 작은 관직과 일반 상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정착했다. 또 이런저런 이유로 고려에 눌러앉아 귀화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질문화가 배척되면서 이슬람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20세기 들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역사의 한 단면을 돌아보면 현재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이슬람 중앙성원의 두 개의 첨탑과 이태원 일대 이슬람 식당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것은 우연은 아닐 듯싶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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