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報 독자인권위 좌담]주제: 보도용어와 인권

  • 입력 2009년 2월 19일 02시 58분


독자인권위원회 윤영철 위원, 정성진 위원장, 황도수 위원(왼쪽부터)이 17일 본사 편집국 회의실에서 ‘보도용어와 인권’을 주제로 토론했다. 박영대 기자
독자인권위원회 윤영철 위원, 정성진 위원장, 황도수 위원(왼쪽부터)이 17일 본사 편집국 회의실에서 ‘보도용어와 인권’을 주제로 토론했다. 박영대 기자
《전쟁으로 묘사되는 여야 정쟁(政爭), 봉건적 냄새가 물씬한 인사(人事) 평가, 일방적 주장만 담은 법안 명칭. 최근 정치권의 못난 모습만큼이나 일그러진 표현들이 언론에 난무하고 있다.

정치권과 언론의 신중치 못한 언어 선택은 부지불식간에 사안을 왜곡해 사회적 갈등과 증오를 증폭시키고 결과적으로 인권

침해로까지 이어진다고 지적된다. 본보 독자인권위원회는 17

일 ‘보도용어와 인권’을 주제로 좌담을 갖고 그 실태와 문제점 등을 짚었다. 정성진 위원장(전 법무부 장관)과 윤영철(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장) 황도수(변호사) 위원이 참석했다.

사회=황유성 지식서비스센터장》

‘입법전쟁’ ‘워룸’ 등 갈등조장 전쟁용어 삼가야

―실태부터 살펴보시죠.

▽정성진 위원장=‘입법 전쟁, 속도전, 전면전, 선전포고’ 등 전쟁 군사용어는 갈등과 대결을 부추기고, ‘돌아온 왕의 남자들, 왕수석, 왕비서관’ 등 봉건 전제적 표현은 민주적 정치시스템보다 권위주의적 권력구조를 조장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 정치수준을 후퇴시키고 비하한다는 점에서 국민의 격(格)을 낮추는 부정적 영향이 지적됩니다. ‘마스크 금지법, 댓글 처벌법, 휴대전화 도청법, 떼법 방지법’ 등 투쟁적 법안 구호를 언론이 여과 없이 전달할 때도 있지요. 이성적 판단보다 감성적 충동에 호소해 독자의 판단을 오도하거나 국민의 인식을 왜곡합니다.

▽윤영철 위원=여야 갈등을 ‘법안 전쟁’이라 묘사하고 ‘워룸(war room)’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연다는 등의 표현은 설령 정치권에서 사용한다 하더라도, 갈등을 과장하거나 증폭시키고 비정상적인 위기의식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언론이 그대로 쓴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군사문화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도 줄 수 있고요. 자극적 선정적 표현으로 독자의 눈길을 쉽게 끌겠다는 언론의 상업적 계산이 이런 현상을 부추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황도수 위원=사물이나 현상의 의미와 특성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독자가 효과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용어를 선택하고 사용하려는 것은 언론의 속성이라고 봅니다. 전쟁 군사용어야말로 우리의 역사적 배경도 있어서 일반에 가장 익숙하고 인식하기도 쉽지요. 의미 전달이라는 목적만 감안한다면 자극적 선정적 상업적인 용어 사용이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하지만 언론이 지향해야 할 미래 가치와 사회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 제시, 교육적 기능에는 소홀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왕의 남자’ 봉건적 인상, ‘꽃보다 ○○’는 언어파괴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정확-객관적인 표현 사용을

―‘꽃보다 남자’ ‘왕의 남자’ 등 드라마나 영화 제목을 딴 유행에 민감한 표현들도 보도용어를 혼탁하게 한다는 지적입니다.

▽윤 위원=‘꽃보다 남자’는 일본어의 본래 의미와 동떨어진 부정확하고 이상한 표현입니다. ‘왕의 남자’라는 말에서는 봉건적 인상과 음습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흔히 쓰는 ‘인터넷 괴담’도 ‘여고 괴담’이라는 영화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영화나 드라마적 표현은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방해할 뿐 아니라 독자가 나름의 해석을 덧붙일 위험도 있어 사용을 자제해야 합니다.

▽황 위원=‘꽃보다 ○○’식으로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용어를 붙여 쓰는 언어 파괴 현상이 젊은 층의 신드롬이 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언어 파괴 현상을 새로운 언어 표현이 탄생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면 이를 어떻게 소화해나가야 하는가는 또 다른 과제의 측면에서 고민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왕의 남자’라는 표현도 가신(家臣) 정치나 밀실 정치 등 퇴행적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하지만,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로 가자는 의미가 아니라 시대에 맞지 않는 잘못된 정치 행태를 비판하는 데 그만큼 상징적이고 요약적인 용어를 찾지 못한 탓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개선 방향에 대해….

▽윤 위원=전쟁 군사용어는 적군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만들고 상대방을 대화와 타협보다는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게 됩니다. 사회의 갈등 상황에 대해 이런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비유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황 위원=사회 구성원이 다같이 공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본다면 전쟁용어는 사회 자체를 분리시키고 배타성을 증폭시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저해요인이 된다고 판단됩니다. 국가의 의사결정이 편향되지 않도록 언론이 용어 선택에 더욱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 위원장=보도용어가 강자에 대한 비판적 기조를 갖는다고 해도 정확성이 전제돼야 생명이 있습니다. 어떤 용어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하더라도 언론이 감당해야 할 기능적 측면을 감안한다면 국민의식을 왜곡할 수 있는 표현의 선택은 신중해야 합니다. 정확성 공정성 객관성이야말로 보도용어의 기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차제에 언론사가 용어 사용에 대한 자체 심의 기능을 강화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극복해나가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정리=김종하 기자 1101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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