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민생대책 읍면동 공무원 1, 2명이 처리
인력 달려 일반직이 순환근무… 사후감독도 부실
일자리로 자활 돕기보다는 단순 생계보조에 그쳐
“제가 맡은 기초생활수급자만 300명이 넘습니다. 추가로 이달 말까지 방문해 상담하라고 배정받은 집이 100여 가구나 되지만 아직 절반도 못 갔어요. 정부가 예산을 더 푼다는데 제 몸이 두 개, 세 개라면 몰라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서울의 한 동(洞) 주민센터에서 복지업무를 담당하는 김모 씨는 이달 들어 매일 야근을 했다. 새 학기 개학을 앞두고 저소득층 자녀의 학비 지원 업무가 몰린 데다 경기침체 탓에 긴급생활보호 요청이 폭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하루 30∼40명이던 방문 상담자도 요즘은 50∼60명으로 크게 늘었다.
정부가 각종 민생안정 대책을 쏟아내면서 일선 현장의 복지전달체계에 심각한 ‘병목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중앙정부와 사회취약계층 사이에서 접점 역할을 하는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사회복지전담 공무원에게 복지 관련 업무가 집중되는 ‘깔때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정부도 이런 상황을 인식해 복지전달체계 개편 작업에 착수했지만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 동맥경화 걸린 복지행정
한나라당 원희목 의원에 따르면 보건복지가족부가 시행하는 사회복지 및 의료보건서비스만 해도 100가지로 이들 서비스에 올해 책정된 예산만 18조4355억 원에 이른다.
이 중 13조4095억 원이 쓰이는 사회복지서비스 예산은 대부분 기초 지자체별로 몇 안 되는 사회복지 공무원을 통해 집행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7월 현재 전국의 읍면동 주민센터에서 실질적으로 사회복지 업무를 맡은 공무원 수는 평균 1.3∼2.3명에 불과하다.
교육과학기술부(장학), 국토해양부(임대주택), 노동부(고용지원 및 실업급여) 등 다른 부처들도 다양한 명목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시의 ‘SOS 위기가정 특별대책’처럼 지자체가 추진하는 복지사업도 있다.
전문가들은 각 부처가 즉흥적 경쟁적으로 민생대책을 쏟아내고, 여기에 정치권의 선심성 대책까지 더해지면서 현장에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복지제도가 복잡해졌다고 지적한다.
허술한 복지전달체계를 그대로 두고 추가경정예산의 상당 부분을 민생지원에 할애한다면 어려운 처지의 저소득층을 돕는다는 취지와 달리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다.
○ 사후관리 부족, 복지 따로 고용 따로
복지서비스의 취지와 업무 내용을 숙지한 전문공무원이 많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이 따로 있지만 수가 부족해 일반 행정직 공무원들이 1년 단위로 순환근무를 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소수의 직원이 과도한 책임을 지는 동시에 현장에서 수급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할 때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다 보니 사후 관리나 감독도 쉽지 않다. 최근 서울 양천구에서 벌어진 장애인 보조금 횡령사건, 부산에서 발생한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생계비 착복 사건 등은 부실한 사후감독이 키운 ‘예고된 비리’다.
각종 보조금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지급됐는지 사후점검을 철저히 하려면 대상자의 소득과 자산, 부채 파악이 급선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사회복지통합관리망’을 구축하고 있지만 일러야 11월경에나 가동될 예정이어서 상당 기간 복지행정의 혼선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일자리가 최선의 복지”라고 강조해 왔지만 한국의 복지제도는 여전히 생활비 보조 같은 직접 지원에 무게가 실려 있다.
사회보장급여를 담당하는 복지부와 고용대책을 맡은 노동부의 업무가 유기적 연결성을 갖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선진국의 복지정책은 복지와 고용이 함께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두 분야를 한데 묶어 정부 지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새는 복지지원금… 실사현장 따라가보니▼
“이혼하고 선배 집 더부살이” 생활보장지원 요청
실제 사는 아파트 찾아가자 “여길 어떻게” 당황
21일 오후 7시. 서울 강동구 복지조사팀 이선자 씨는 H 씨(50대)의 집으로 추정되는 아파트 앞에서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H 씨는 “이혼하고 집도 없어 선배 집에 얹혀산다”며 기초생활보장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씨가 H 씨의 선배 집에 가보니 도저히 얹혀살기 힘든 비좁은 집이었다. 이 씨는 H 씨가 지원금을 타기 위해 허위신고를 했다고 판단했다.
이 씨는 H 씨 가족의 가족관계등록부 등을 참고해 그가 실제 살고 있는 아파트를 알아냈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을 연 H 씨는 “여길 어떻게 알았느냐”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씨는 “처음에 솔직히 말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며 “기초생활보장지원은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올 1월 긴급복지지원 건수는 전국에서 3714건으로 지난해 1월(2328건)에 비해 59.5% 늘었다. 지원을 받는 사람은 5915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복지부와 지자체에서 각종 민생안정대책을 시행한 결과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공무원은 “부정수급이나 허위신고가 크게 늘어 실사 나갈 시간이 부족하다”며 “‘찾아가는 복지’ ‘발굴하는 복지’라는 구호는 환상”이라고 털어놨다.
복지지원 담당 공무원이 신청자의 실제 생활여건을 실사하는 데는 며칠씩 걸린다.
거주지 위장전입 후 지원금을 타내려는 경우, 4대 보험 미가입자이거나 소득신고를 하지 않은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 “호적상 자식이 있지만 연락 끊고 산 지 오래됐다”며 부양의무자가 없다고 말하는 노인의 경우 등은 현장조사 없이 지원 대상 여부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만큼 지원 대상이 아닌 사람에게 눈먼 돈이 나갈 가능성도 크다.
정작 지원 대상이 되는데도 지원받을 수 없는 ‘완전한 사각지대’도 적지 않다.
장모 씨(50대)는 사업자등록 없이 소규모 인테리어 하청업을 하다가 지난해 12월 폐업했다.
폐업 후 장 씨는 생활이 막막했지만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사업자등록증이 없어 폐업·실업임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자치구 복지지원과장은 “정부 차원의 시스템으로 사각지대를 골라내기 힘들다면 전담반을 만들어 현장에 나가 실사하거나 사각지대를 찾아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전문가 기고 ▼
최균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복지 재원은 적절하게 배분돼야만 정책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 효과적인 복지전달 체계의 구축과 원활한 작동이 핵심 조건이다.
그러나 현행 체계는 대상자 선정의 비합리성, 복지서비스 정보 분산, 서비스 전달 과정의 복잡성, 통합관리 부재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퍼주기식 복지’를 개선하기 위해선 대상자 선정의 합리성을 제고하고 급여의 부정사용 방지를 위한 제도적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 급여의 효과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사후관리체계와 사회복지 통합관리망 구축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행정인력 확충과 전문성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 각종 복지사업이 증가함에 따라 일선 복지행정 현장에서는 깔때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즉, 여러 중앙부처에서 계획한 정책들이 하달돼 각종 사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업무 부담이 발생하고 있다.
또 복지전달체계 구조를 수요자 중심, 맞춤형서비스 제공, 통합관리체계 구축을 목표로 개선해야 한다. 현재 정부가 계획 중인 ‘희망복지지원단’은 복지, 노동, 보건·의료, 주택, 교육 분야에 맞춤형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구축해야 한다. 부처이기주의가 개입돼 행정 분산과 같은 병폐가 재연돼서는 안 된다.
공공부문의 역할을 보완해 줄 민간부문 자원과의 연계 및 협력체계도 마련해야 한다. 민간부문은 공공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까지 복지서비스와 자원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할 만큼 자원과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