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 캠퍼스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해 4월 동의대 김창호 교수가 대학이 개입된 입시부정을 폭로하자 학생들은 “입시부정의 진상을 밝히라”며 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는 5월 1일 노동절을 거치면서 당시 시국과 맞물려 점차 과격해졌고 학내에 화염병이 나뒹굴기 시작했다. 2일에는 학생들이 시위 도중 전투경찰 5명을 납치해 중앙도서관에 감금했다.
다음 날 새벽 부산시경 기동대 소속 경찰 600여 명은 전경들을 구하기 위해 도서관 7층으로 진입했다. 그 순간 계단 입구에 기름통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100여 명의 학생이 경찰을 향해 석유와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다. 계단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최동문 경장 등 7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 10명은 중화상을 입었다.
경찰은 시위 주동자들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이들 중 31명은 특수공무방해치사죄로 징역 2년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다. 이른바 ‘부산 동의대 사건’의 전말이다.
이후 2002년 4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의대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포함해 46명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했다. 1인당 평균 2500만 원가량의 보상금도 지급했다.
경찰 유족들은 “가해자들에게 명예 보상을 해줌으로써 유족들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위원회 결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2005년 10월 판결에서 ‘유족은 위원회의 결정으로 인격권이나 명예권을 침해당한 직접 당사자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재판관 5 대 4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다만 소수의견을 낸 4명의 재판관은 “불법으로 납치 감금된 동료 경찰관을 구출하려는 경찰에 대항해 밀폐된 옥내에서 화염병을 사용해 7명의 경찰관을 사망하게 한 행위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및 법치주의 정신과 가치에 부합할 수 없다”며 “민주화운동 인정 결정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반대 의견을 개진한다”고 판결문에 밝혔다. 이들 재판관은 또 “폭력적 범죄행위를 적극적으로 저지른 가담자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해 법집행 과정에서 생명을 희생한 경찰관과 유족의 사회적 명예를 훼손했다”며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의) 결정은 취소돼야 마땅하다”고 명시했다.
이후에도 유족과 보수 성향 단체들은 위원회에 재심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년 4개월이 지난 올해 2월 13일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김경한 법무부 장관에게 “학내 문제로 경찰을 희생시킨 불법 폭력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킨 것이 정당한 것이냐”고 따졌다. 김 장관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전 의원은 대정부질문 이후 곧바로 재심을 법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관련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개정안은 ‘위원회의 결정에 중대한 변경 사유가 발생했을 경우 신청사건의 심의를 완료한 후 1회에 한해 직권으로 재심을 할 수 있다. 재심의 시효는 10년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동의대 사건을 포함해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의 모든 결정에 재심의 길이 열린다.
다만 현재 보상심의위의 구성원 대다수가 노무현 정부 시절 임명된 진보성향의 인물들이어서 이들이 임기를 마친 뒤에나 본격적인 재심이 추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소급입법 논란과 관련해 전 의원 측은 “국회 입법정책처와 법조계의 조언을 구한 결과 위원회의 결정은 행정처분 성격인 데다 개정안이 위원회의 결정 자체를 취소하거나 변경하는 것이 아니어서 소급입법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전 의원의 법안 발의에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 그러나 1999년에 당시 여당으로서 이 법을 통과시켰던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인 민주당은 법안이 발의되면 강력히 반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