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병으로 입을 제외한 전신이 마비된 구족화가 김영수 씨가 입에 문 붓을 서서히 옮기기 시작했다. 붓을 따라 어느새 산과 꽃이 아름다운 색과 함께 살아났다. 그의 화폭엔 봄이 벌써 찾아왔다.
23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과 실내체육관 사이 사무실에 위치한 ‘잠실장애인미술 창작 스튜디오.’ 작가들이 한창 작업 중인 스튜디오는 물감 냄새만이 은은히 풍길 뿐 조용했지만 그 가운데 화가들의 뜨거운 열기가 감돌았다.
○ 전국 유일의 장애인 창작 스튜디오
서울시는 2007년 10월 잠실올림픽주경기장 옆 사무실을 개조해 국내 유일의 장애인을 위한 창작스튜디오인 ‘잠실장애인미술 창작스튜디오’의 문을 열었다.
개인별 창작 부스와 작은 갤러리 등이 꾸며진 이곳 472m² 규모의 스튜디오에서는 현재 2기 작가 14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개인전을 6, 7회씩 열 정도로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해온 프로 작가도 상당수.
사실 이동하기 힘들어 잠실 스튜디오까지 나오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들지만 다들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 스튜디오를 찾아 창작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그만큼 창작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작업에 열중하기도 힘들뿐더러 혼자 작업을 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었던 이들에게 작업공간을 가지는 것은 숙원이었다.
김 작가는 “집에서는 그림을 그리려면 도구들을 다 펼쳤다가 또 멈추면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하니까 몸이 불편한 우리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며 “그림을 그려서 쌓아두다 보면 또 금세 방이 창고로 변해버려 집에서 작업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창작스튜디오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남다르다.
어렸을 적 소아마비를 앓아 왼팔 한쪽만을 사용할 수 있는 중증장애인인 문은주 작가는 “일산 집에서 전철을 타고 오는데 2시간 넘게 걸린다”면서도 “비록 3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이곳에서 작업을 할 때가 참 행복하다”고 전했다.
작가들은 혼자만의 방을 벗어나 동료 작가들과 서로 소통하며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일반인들을 교육하며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이곳 스튜디오만의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 “이곳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길”
물론 첫 장애인 스튜디오이어서인지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작가들은 “자동문과 수도시설 등 장애인을 위한 시설과 다소 좁은 개인 창작공간이 보강됐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창작공간에 목말라 있는 많은 장애인 예술가를 위해 이런 스튜디오가 서울 이곳저곳 더 나아가 전국에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풀어놓았다.
조혜영 작가는 “두 팔 없이도 세계적인 화가가 된 영국의 앨리슨 래퍼 같은 이가 서울에서도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 창작공간 등 실질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곳을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는 한국장애인미술협회는 작가들과의 협력 속에 올 3월부터 장애아동들을 위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작년에 진행되던 누드 크로키, 서예 교육 프로그램도 이어갈 예정이다.
한국장애인미술협회 부회장이자 스튜디오 관리소장인 유제흥 작가는 “갤러리 전시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일반인들과 예술을 공유하는 등 스튜디오를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