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열풍… 그들은 왜 ‘흰가운’을 고집하나

  • 입력 2009년 2월 25일 02시 59분


서남대 의대에 다니는 이종민 씨(오른쪽)와 정우한 씨가 의대 건물 앞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의사국가고시 98% 합격’이라고 쓰인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김기용 기자
서남대 의대에 다니는 이종민 씨(오른쪽)와 정우한 씨가 의대 건물 앞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의사국가고시 98% 합격’이라고 쓰인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김기용 기자
‘SKY 대학’ 합격증 던지고 남원 서남大로 간 수험생들

《“서남대 의대를 아시나요.” 서울 S고를 전교 2등으로 졸업한 민규(가명·19) 군은 2009학년도 대학입학 원서를 쓸 때 서남대를 난생 처음 알았다.

전북 남원에 있는 서남대는 1991년 개교한 4년제 종합대학.

이번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460점대(원점수)인 민규 군은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에도 합격했다. 최종 결정에선 그동안 듣도 보도 못했던 서남대를 택했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 합격선, 서울大 공학계보다 높은 수준

민규 군처럼 대한민국 상위 1%에 드는 고고 3학년 자연계 학생이 서남대에 진학했다면 가장 큰 이유는 의대 때문이다.

김영일교육컨설팅㈜의 김영일 원장은 “서남대는 일반 사람들이 거의 모를뿐더러 과거 재단 비리 문제가 있었던 학교다. 그러나 서남대 의대에 합격하려면 수능 백분위 97% 이내, 내신 주요 교과 석차등급이 1.9등급 이내에 들어야 한다”며 “이 정도 수준이면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고려대 생명과학계열학부 등에 합격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입시전문기관인 진학사의 분석에서도 서남대 의대가 서울대 공학계열, 물리천문학부, 연세대 컴퓨터정보공학부, 고려대 생명과학계열학부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9학년도 대입은 지방 의대를 중심으로 경쟁률이 치열했다.

가∼다군에 걸쳐 분할 모집한 서남대 의대는 △가군 3 대 1(지난해 2.43 대 1) △나군 4 대 1(지난해 2.36 대 1) △다군 6 대 1(지난해 5.6 대 1)이었다.

강원 강릉에 있는 관동대 의대는 다군의 경쟁률이 지난해 3.96 대 1에서 올해 10.54 대 1, 수원에 있는 아주대 의대는 지난해 7.3 대 1에서 올해 14.29 대 1로 크게 올랐다.

자연계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서울대 의대부터 서남대 의대까지 전국 27개 의대(의학전문대학원 전환 14개 대학 제외) 정원을 다 채우고 난 후에 서울대 공대 정원이 찬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다.

진학사의 대입 자료에 따르면 의대를 제외하고 서울대 자연계에서 가장 점수가 높은 자유전공학부보다 인제대, 순천향대, 계명대 의대의 입학 점수가 더 높다.

○ “학교지명도보다 의사사회 내 차별 걱정”

고등학교 때 전교 1, 2등을 다투며 이른바 ‘SKY대’에 충분히 진학 가능한 학생이라면 아무리 의대라도 서남대에 가는 것에 대해 정말 고민이 없었을까.

서남대 의대와 고려대 공대에 동시 합격한 A 군은 “의대를 졸업해 흰 가운을 입는 순간부터 서남대냐 서울대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의사에게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고 묻는 환자를 본 적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사 사회 내의 차별과 학교 차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실력 차이가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서남대 의대는 캠퍼스가 있는 남원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광주에 협력병원 2곳이 있다. 실습을 하려면 학생들은 광주까지 이동해야 한다. 병원이 오래되고 시설이 낙후된 것도 사실이다.

서울대 생명과학부에 합격했지만 서남대 의대를 택한 B군도 “지방으로 가야 한다는 불안감, 이름 없는 학교에 진학한다는 열패감, 더 좋은 의대에 못간 데 대한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재수를 통해 합격한 C 양은 “서남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도 겁난다”고 말했다.

○ 불확실한 ‘꿈’ 버리고 확실한 ‘미래’ 선택

걱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신입생들의 서남대 의대 선택 논리는 비교적 명확하다.

‘서울대를 졸업한다고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지만 의대를 졸업하면 부와 명예가 보장된다’ ‘자신의 꿈과 상관없이 SKY대를 지원하는 것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 간판을 포기하고 서남대 의대를 가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것이다.

본과 3학년인 이종민 씨(26)는 “서남대 의대의 가장 큰 약점은 역사가 짧아 선배가 적다는 것”이라며 “의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경쟁력 약화와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국가시험 합격률이 매년 100%에 육박할 정도로 공부량이 많고 최근 서울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하는 선배가 졸업생의 절반 가까이에 이른다”고 말했다.

본과 2학년 정우한 씨(21) 역시 “서울대 의대도 서남대 의대도 내과 교재는 결국 ‘해리슨’으로 똑같다”며 “훌륭한 의사가 되느냐 마느냐, 의사로서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결국 스스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의대 진학 화려한 성적표 상산高이사장 쓴웃음 왜?

“훌륭한 과학자 양성 꿈 의사직 쏠림현상 염려”

의예과·치의예과·한의학과 합격 87명, 서울대 33명, 고려대 92명, 연세대 79명….

자립형사립고인 전북 상산고의 2009학년도 대학입시의 화려한 성적표다. 올해 졸업생 335명 가운데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소위 ‘SKY대’ 진학생만 60.9%(204명)이고 의·치·한의대 진학률은 26%에 이른다.

그러나 ‘수학의 정석’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이 학교 홍성대 이사장(사진)은 이런 성적이 반갑지만은 않다.

“제가 상산고를 설립한 목적은 우리나라에서도 퀴리 부인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훌륭한 과학자를 길러내고 싶었던 것이지 의사들만 잔뜩 양산해 내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2009학년도 대입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도 홍 이사장은 교직원들에 대한 칭찬 대신 걱정부터 털어놨다. 다음 보고 때부터 변화가 생기긴 했다.

교사들은 보고서 맨 앞에 올리던 의·치·한의대 합격생 수를 맨 뒤로 돌렸다. ‘의·치·한의대 합격생 수’라는 항목도 ‘기타’로 처리했다.

홍 이사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단순히 이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다”며 “어린 학생들에게 미래, 도전, 꿈을 심어줄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학교 정진호 교감은 “학생들이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교사들을 독려하고 있다”며 “하지만 학생이나 부모의 의지가 더 중요하고 잘못될 경우 원망을 살 수도 있기 때문에 교사들이 나서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홍 이사장도 “교장이나 교감에게 질책 아닌 질책을 했지만 그 사람들이라고 학생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꾸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홍 이사장이 여기서 멈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지금 우수한 상산고 학생들이 교사들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기초과학과 학문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묘안’을 짜고 있다.

‘수학의 정석’ 저자답게 의대 졸업 후 의사들의 생활, 의사라는 직업의 미래 변화 양상, 기초과학이 가지는 파급력 등에 관한 정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감정과 감성이 아닌 수치와 통계로 학생들을 설득할 요량이다.

홍 이사장의 가장 큰 걱정은 어린 학생들이 미래를 내다보며 도전하지 않고 눈앞의 화려함만 좇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대 진학과 의사라는 직업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우수한 학생들이 진로를 정할 때 깊은 고민 없이 ‘의대로, 의대로’만 쏠리는 현상을 염려하는 것뿐이다.

조만간 선보일 홍 이사장의 ‘상산고 학생 다양화 프로젝트’가 기대된다.

김창혁 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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