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12일 노동운동의 한 축인 민주노총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달 초 조직 간부의 성폭행 미수사건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시작된 범사회적인 반(反)민주노총 정서는 산하 사업장의 잇단 반발에 이어 제3의 노총 건설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민주노총은 위기 탈출을 위해 이날 '혁신 대토론회'를 개최했지만 오히려 그동안의 누적된 불만만 표출시키는 계기가 됐다.
●"암이 자라서 사망할 지경"
민주노총은 이날 서울 영등포구 사무실에서 장장 10시간에 이르는 '혁신 대토론회'를 열었다. 민주노총에 우호적인 진보 인사들로부터 애정 어린 비판과 조언을 듣자는 취지.
그러나 이 자리는 오히려 현재의 민주노총이 단순한 위기 수준이 아니라 해체 직전의 상황임을 반증하는 자리가 됐다.
정윤광 노동전선 정책위원은 "민주노총은 내부 곳곳에서 이미 암이 자라고 있어 머지않아 사망할 위기에 다가가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4, 5년 전부터 암에 걸렸다고 지적했지만 이제는 암 덩어리가 온몸으로 퍼져 더 이상 구제할 길이 없다"며 "민주노총의 혁신은 이제 불가능하고 사망을 준비해야한다"고 말했다.
조형일 혁신연대 집행위원은 "민주노총의 위기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심각하다"며 "실천 없이 10년 넘게 혁신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말로 위기의 본질"이라고 지적했다.
이승우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부의장도 "민주노총은 경험이 부족한 일꾼과 전문성은 있으나 관료화된 간부들의 복합체"라며 "사람들은 '민주노총이 리모델링을 시도하는 시기는 끝났고 이제는 (헌)집을 부수고 새 집을 지어야 한다'고 지적한다"고 말했다.
노동자 없는 민주노총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민주노총은 정규직 노동자의 대변인으로 전락했고, 이익단체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성희 민주노동당 2010 상임위원은 "민주노총이 노조가 책임져야 할 많은 문제를 정권과 자본의 탄압으로만 돌린 채, 자기성찰을 외면하고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하지 않았는지 곱씹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뼈아픈 지적이 잇달았지만 약 60~70여 명의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반발이 나오지 않았다.
한 토론회 참석자는 "현재 위기의 원인과 처방을 조직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 알면서 이런 토론회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형식적인 것 아니냐"고 말했다.
●내우외환 기아차
상황이 이지경인데도 민주노총 안에서는 핵심사업장 중 하나인 기아자동차 노조가 노(勞)-노(勞) 갈등을 빚고 있다.
기아자동차 노조원 200여 명으로 구성된 '기아차 노조 사수 대책위원회'가 상급기관의 산별노조 방침을 거부하고 나선 것.
대책위는 17일 조합원 총회 소집을 공고하기로 하고 노조 소속 변경에 관한 찬반 투표를 벌일 예정이다.
대책위는 이날 금속노조에 보낸 공개 질의서에서 "기아차 노조는 연간 31억 원에 달하는 조합비를 금속노조에 상납하고 선봉에서 투쟁해왔으나 되돌아온 것은 정치 파업에 따른 임금손실과 기업 이미지 하락뿐이었다"며 "금속노조 집행부는 기아차 노조가 지역노조(산별노조)로 전환할 경우 장점이 무엇인지 공개 답변하라"고 요구했다.
대책위는 이번 총회를 통해 금속노조에 납부하는 연간 31억원 가량의 조합비 납부 여부에 대해서도 조합원 의견을 물을 계획이다.
이에 대해 기아차 노조 집행부는 대책위의 총회소집 추진 방침에 대해 "금속노조와 기아차 지부를 무시한 규약위반이며, 노동조합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도전행위라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총 성폭력 진상조사위 활동 종료
공교롭게도 민주노총에 대한 온갖 비난이 쏟아진 이날은 지난달 초 발생한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행 미수사건에 대한 2차 진상조사위 활동이 종료되는 날이다.
민주노총 성폭력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는 지난달 19일부터 활동에 돌입했으며, 지난주 활동 시한을 일주일간 더 연장했다.
진상조사위는 △사건발생 전후 민주노총의 사건처리 과정 및 은폐·축소시도 문제 △향후 노동운동 내 성폭력 사건 재발 방지 및 조직문화 혁신을 위한 대책 제시 등을 주요 역할로 정했다.
하지만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사건임에도 종료 시한인 이날까지 조사 결과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미 관련자들이 다 사퇴한 상황이라 진상조사 자체의 실효성에도 의문이 일고 있다.
우문숙 민주노총 대변인은 "13일 경 기자회견이 있을 수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성토장된 '민주노총 충격보고서' 출판회
이날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고(故) 권영목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의 '민주노총 충격보고서' 출판보고회는 민주노총에 대한 성토장을 방불케 했다.
곽민형 전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 수석부위원장은 "국내 노동운동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이 책을 신호탄으로 새로운 노동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옛 통일중공업 노무담당 이사를 지낸 문갑생 씨(60)는 "이런 보고서가 나왔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행사를 주관한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이 책에 대한 주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10만 부 정도 판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 민주노총 관계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의 한 관계자는 "진짜 환골탈태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이 민주노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기 와서 봐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이성호기자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