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유치원’ 그 명성 어디 가고…

  • 입력 2009년 3월 13일 02시 57분


육영재단 내홍에 쇠락하는 어린이회관 유치원

운영권 마찰… 입학식 미루고 환불사태

잔디밭 수업 포기… 화장실 천장 물 뚝뚝

최첨단 시설로 명문가 몰리던 시절 옛말



기온이 15도까지 오른 11일 오후 1시,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회관 유치원 앞.

검은색 정장의 남성 2명이 길을 막았다. 유치원 앞에 펼쳐진 수백 평 넓이의 잔디밭에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스쿨버스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린이회관 유치원생들은 6일 입학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씨의 추천으로 구성된 임시이사진과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이 운영권 마찰을 빚으면서 입학식이 무기한 연기됐다.

상당수 학부모는 유치원에 수업료 환불 신청을 했다. 하지만 돈을 돌려받아도 걱정이다. 다른 유치원 입학식이 대부분 끝나 아이를 보낼 곳이 없다. 학부모 노모 씨(37)는 “아이가 일곱 살이라 내년에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유치원에 못 들어가면 어떡하느냐”며 발을 굴렀다.

4년 전 800여 명이던 원생은 올해 150여 명으로 줄었다. 박근령 당시 이사장과 재단 직원들이 마찰을 빚으면서 유치원도 파행 운영됐기 때문이다. 유치원 교사들마저 편이 갈려 서로의 수업을 방해했고, 교실이 있는 과학관이 양측에서 동원한 용역직원들에 의해 점거되는 일도 잦았다.

어린이회관 유치원은 한때 명문가 자녀들이 몰리는 ‘명품 유치원’이었다. 육영수 여사가 설립한 육영재단은 그의 뜻을 기려 1983년 유치원을 열었다. “모든 것을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라”는 그의 뜻에 따라 본관 건물에 계단을 없앴다. 불이 나면 학생들이 대피하기 쉽도록 건물도 4층 이하로 지었다.

전체 면적 10만3085㎡에 운동장만 8400㎡. 천문대 등 최첨단 교육시설로 타 지역 원장들이 벤치마킹해가는 ‘유치원의 교과서’였다. 이 때문에 국회의원이나 장관, 군 장성, 대기업 회장의 자녀와 손자들이 서울 전역에서 몰려와 등원 시간만 되면 고급 승용차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전성기 때 원생 수는 13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1998년 외환위기로 고비를 맞았다. 유치원을 소유하고 있는 육영재단은 운영비가 모자라자 예식장 등 수익사업을 시작했다. 교육시설에서 영리사업을 한다는 이유로 박 전 이사장은 직원들로부터 퇴진 압박을 받게 됐고 결국 대법원에서 이사장직 박탈 결정이 났다. 공석이 된 이사회가 지난해 말 동생 박지만 씨의 추천을 받은 인사들로 꾸려지면서 남매간 재단 운영권 다툼이 본격화됐다.

불똥은 아이들에게 튀었다. 넓은 녹지에서 야외수업이 주를 이루던 것이 대부분 실내수업으로 전환됐다. 시설 개선도 뒷전으로 밀렸다.

학부모 김모 씨(40)는 “수업료가 분기당 123만 원이나 되는데 노후 건물을 리모델링한 적이 없다”며 “겨울에도 난방이나 온수 공급이 안 되고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새 아이들은 우산을 쓰고 볼일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12일 새벽에도 재단 노조원 20여 명은 유치원이 있는 근화원 3층을 점거하고 고용 승계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유치원 입학 예정일 하루 전인 5일 새벽, 박 전 이사장이 노조원들과 함께 용역 150여 명을 동원해 사무실을 점거한 지 일주일 만의 일이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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