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규 이화학술원 원장과 이채주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독립유공자 후손 11명을 포함한 역사탐방단 25명은 23일부터 임정이 처음 설립된 중국 상하이(上海)부터 마지막 임정 청사가 있는 충칭(重慶)까지 7개 도시를 돌아보는 중이다. 역사탐방은 29일까지 계속된다.
이 신문은 26일자 5면 ‘남목청(楠木廳) 6호 옛터 중한(中韓)우의를 확인하다’라는 제하의 머리기사에서 “25명의 한국인이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인 남목청 6호 옛터를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창사 시의 도심인 황싱(黃興)로에 위치한 남목청 6호는 임시정부가 창사에서 활동하던 시절 조선혁명당 본부다.
김구(金九) 선생은 62세이던 1938년 5월 6일 밤 이곳에서 당시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3개 계파로 분열돼 있던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토론을 벌이다 통합에 불만을 품은 조선혁명당 소속 당원인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에 심장 부근을 맞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후 이곳은 일반인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 창사 시 정부가 지난해 11월 이곳에서 살던 11가구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25일 탐방단이 방문했을 때는 터 다지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남목청 복원공사를 지휘하는 장사오린(張少林) 창사 시 톈신거(天心閣) 관리처 주임은 “공사비 500만 위안(약 9억6800만 원)을 들여 7월까지 완공한 뒤 관련 자료를 정리, 진열해 올해 10월경 정식 개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톈신거는 장사 시에 있는 진한시대의 유명 고성(古城)으로 남목청 6호는 이 안에 있다.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상하이 항저우(杭州) 난징(南京)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가명을 사용했으나 창사에 머무는 1937년 11월부터 1938년 7월까지 9개월간은 당시 장즈중(張治中) 후난 성 주석 등 국민당 정부의 따뜻한 후원과 지지에 힘입어 김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창사=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