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복귀 안해 1심서 실형
모친 “전과자 안되게 선처를”
2심서 결국 ‘선고유예’ 받아
27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403호 법정. 아들은 피고인석에 앉았다. 참관인석에서 그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두 손을 연방 오므렸다 폈다. 시위 진압에 나섰다가 집단 폭행까지 당했으나 전과자가 될 위기에 놓인 아들의 운명이 곧 결정될 참이었다. 재판장인 이광범 부장판사는 이에 앞서 13일 열렸던 1차 공판에서 방청석에 앉아 있던 어머니 최모 씨(47·여)를 불러 일으켜 세웠다.
“피고인과 똑같이 생긴 분이 참관인석에서 열심히 듣고 있어 어머니인 것 같은데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죠.”
최 씨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아들 인생에 ‘빨간 줄(전과)’이 그어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시위대 앞에 서야 했던 아들이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난 27일. 이 부장판사는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선고유예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형의 선고가 면제되는 판결로 형이 집행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무죄 선고에 가깝다.
이 부장판사는 “사고 후유증이 심각한 데다 고의로 복귀를 피한 것 같지는 않다”며 “피고인이 군 생활을 잘해 상관들이 처벌을 원치 않고, 공무원이 되고 싶은 꿈도 꺾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방청석에서 한 명씩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최 씨를 응원 나온 전·의경들의 어머니들이었다.
지난해 11월 열린 1심에서 최 씨의 아들 이모 씨(22)는 부대 미복귀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사건의 발단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6월 말이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306전경대 상경이었던 이 씨는 집회 통제를 위해 서울 중구 태평로에 투입됐다. 그러나 그날 새벽 이 씨의 중대원 20여 명은 진압 도중 시위대에 둘러싸여 쇠파이프로 집단폭행을 당했다. 이 씨도 헬멧이 깨지고 어금니 두 개가 부러질 만큼 얻어맞은 뒤 실신했다.
뇌진탕 진단을 받은 이 씨는 3주 뒤 부대에 복귀했으나 두통과 단기기억상실 등 후유증이 계속됐다. 치료차 외박을 나와서도 집에서 잠만 자며 나흘을 보냈다. 이 씨는 부대에 들어간다며 집을 나섰다 행방불명됐다.
최 씨는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지하철 폐쇄회로(CC)TV를 샅샅이 뒤지고 지하보도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들을 들추며 서울 곳곳을 헤맸다.
아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부대 미복귀자로 고발됐다. 그리곤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한 달 만에 인천의 한 PC방에서 붙잡혔다. 이 씨는 “지하철에서 잠이 들어 복귀시간을 놓쳤고, 부대에 돌아가려 노력했지만 촛불 진압작전에 나갈 것이 두려웠다”고 해명했지만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때부터 법정공방이 시작됐다. 최 씨는 9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생계유지를 위하여 해 오던 보습학원 강사 일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이 씨의 소속 기동단 간부 87명이 법원에 탄원서를 내주고 전·의경 어머니 300여 명이 육성녹음 CD를 재판 때 쓰라며 건네는 등 도움의 손길이 이어져 힘겨운 투쟁을 해낼 수 있었다.
이 씨는 11대 독자로 군대에 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남들 앞에 당당하고 싶다며 전경으로 입대했다. 부상 후 의가사제대를 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이 씨는 “군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며 버텼다. 그렇게 이 씨는 만기를 채우고 18일 제대했다. 이제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은 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계획이다. 2심 판결로 억울함은 덜었지만 최 씨의 아들 걱정은 여전하다.
“아프다는 얘기를 한 번도 안 하던 아이가 요즘엔 ‘머리가 멍하다’,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아요. 나라에서 불러 시위대 앞에 선 사람들이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는 일은 이제 없어야 되지 않을까요.”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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