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계단’은 없었다
말과 당나귀는 닮았다. 짝을 맺으면 노새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종(種)이 아니다. 노새는 새끼를 못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푸들과 불도그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그래도 이들은 같은 종이다. 새끼를 낳을뿐더러 그 후손이 또다시 자식을 만들 수 있는 까닭이다.
지구상에서는 수백만 종이 넘는 생물들이 있다. 각각은 서로 교배하지 못한다. 이 많은 종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신이 만들었다’는 가장 속 편한 설명이 되겠다. 사람들은 신이 만든 ‘자연의 계단’을 믿었다. 가장 높은 층에는 신이 있고, 제일 밑 계단에는 벌레들이 있다. 인간의 위치는 대천사와 천사 다음이다. 인간은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로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이런 환상을 단박에 깨뜨려버렸다. 자연의 계단 같은 것은 없다. 모든 생물은 ‘생명의 큰 나무’의 한 부분일 뿐이다. 원래는 하나였지만, 엄청난 시간 동안 하나둘씩 다른 종으로 떨어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기르는 가축에 주목한다. 암탉은 품지도 않을 알을 매일 낳는다. 젖소는 엄청난 젖통을 가졌다. 야생상태라면 버거워서 돌아다니기도 힘들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이상한 일이 생겼을까? 인간이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유리한 놈들만 계속 교배를 시켜 얻어낸 결과가 지금의 가축들이다. 다윈 시대에 비둘기 장수들은 “어떤 날개라도 3년이면 만들고, 원하는 모양의 머리와 부리를 갖추는 데는 6년이면 충분하다”고 장담했단다.
그렇다면 자연도 생명을 ‘선택’하지는 않았을까? 불과 3년 만에 이런 결과를 얻는다, 수천, 수만 년 동안에는 더 엄청난 변화도 가능했을 법하다. 이를 다윈은 ‘자연선택’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생물들은 모두 자연이 살아남는 데 유리한 것들만 솎아낸 결과물이다.
자연선택을 이끄는 힘은 ‘생존투쟁(Struggle for Existence)’이다. 생존투쟁은 들개 두 마리가 먹이를 놓고 경쟁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막 가장자리에 나무 한 그루도 힘든 생존투쟁을 겪는다. 모든 생명은 하나같이 생존투쟁을 겪어야 한다. 이 가운데 유리한 특성을 갖춘 놈들은 살아남고, 불리한 놈들은 사라져버린다.
생명은 생존투쟁을 통해서만 선택되지 않는다. 짝짓기를 통해 암컷과 수컷은 서로를 고른다. 이른바 ‘자웅선택’이다. 생존에 유리한 특성과 짝에게 다가가는 매력은 꼭 같지 않다. 무척 사나워서 자기 새끼까지 잡아먹는 새와, 짝과 자식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새가 경쟁한다고 해보자. 더 후손을 남길 가능성은 가족에게 따뜻한 쪽이 더 높다.
모든 생명은 생존투쟁과 자웅선택을 통해 진화하며 만들어졌다. 다윈은 진화의 구체적인 증거들을 조목조목 내놓는다. 고래의 앞 지느러미뼈와 사람의 손의 구조는 비슷하다. 심지어 박쥐의 날개도 그렇다. 이른바 ‘형태학적 유사성’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발생 과정도 모든 동물이 비슷하다. 나아가 꼬리뼈 같은 흔적기관도 생명체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진화해 왔음을 일러준다.
하지만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 ‘털 없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마주할 엄두가 안 났던 탓이다. 150년이 흐른 지금, 진화론은 인간의 정신까지도 당당하게 해석해 낸다. ‘진화심리학’ 같은 분야는 이미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현대의 유전학은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 차이가 0.4%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인간은 가치 없는 존재로 추락하지 않았다. 되레 자연 전체를 인류의 소중한 동반자로 보듬어야 한다는 목소리만 더 커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의 기원’을 진정한 환경운동의 출발점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