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충북 옥천군 옥천읍 ‘옥천한국어학당’ 내 세미나실. 2006년 베트남에서 옥천으로 시집온 짠티투 씨(한국명 한지혜·26)는 또래의 결혼이주여성 30여 명과 함께 한 강사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듣고 공책에 열심히 적어 나갔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는 김태임 대전대 보건대 교수. 김 교수는 미리 준비한 슬라이드 영상을 통해 여러 여성 질환의 원인과 예방법 등을 결혼이주여성들이 알기 쉽게 설명했다. 세 살배기 딸을 두고 있는 짠티투 씨는 “매주 금요일이 가장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베트남에 살 때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고향 친구들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1시간여 보건교육을 받은 그녀는 잠시 뒤 한국어 고급반 강의실로 옮겨 한글 받아쓰기에 열중했다.
같은 날 오후 결혼이주여성 방문지도사 김경아 씨(41·여)는 캄보디아 출신 콘티아 씨(28)의 옥천읍 아파트를 찾았다. 7개월 된 딸아이를 둔 콘티아 씨에게 유아식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날. 김 씨는 미리 준비한 고구마를 도마에 놓고 자르고 삶는 법을 또박또박 설명했다. 2007년 시집온 뒤 곧바로 임신해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적었던 콘티아 씨는 서툰 한국말로 연방 질문을 해댔다.
고구마를 삶는 동안 거실에는 작은 책상이 놓였다. 왼손잡이인 콘티아 씨는 선생님이 불러주는 과일과 채소 이름을 네모 칸이 있는 노트에 한글로 꾹꾹 눌러 쓰기 시작했다.
김 씨는 “콘티아 씨처럼 양육 문제 등으로 학당에 한글을 배우러 나올 수 없는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해 방문지도사들이 매주 두 차례씩 나와 양육법 등을 알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충북 옥천으로 시집온 결혼이주여성들의 ‘도우미’ 기관인 사단법인 결혼이민자가족 지원연대 ‘옥천한국어학당’(대표 전만길·51). 2004년 문을 연 옥천한국어학당은 이 지역 결혼이주여성들에겐 단순한 한글교육기관이 아니라 든든히 기댈 수 있는 ‘친정 엄마’다. 낯선 땅, 낯선 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먼저 찾아 나서 혈육처럼 보듬어 주기 때문이다.
짠티투 씨는 “한국말과 음식, 생활방식, 전통문화 등 다양한 것을 배울 수 있어 좋지만 무엇보다 (결혼이주여성들을) ‘남’이 아닌 ‘우리’로 대해 줘 고맙다”고 말했다. 콘티아 씨의 남편 서준택 씨는 “살아온 환경과 문화가 달라 아내가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까 봐 걱정했는데 옥천한국어학당이 큰 도움을 줬다”며 고마워했다.
○ 해외서 견학 오는 모범기관
2004년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던 전 대표는 고향인 옥천에 결혼이주여성들이 느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데 이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는 이들에게 우리 글과 문화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었고 2004년 3월 옥천한국어학당을 열었다.
“옥천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방 한 칸을 빌려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전현직 교사와 주부 등 4명이 선뜻 자원봉사에 나섰고, 소문을 듣고 9명의 결혼이주여성이 첫 학생으로 등록했습니다.”
다정하고 꼼꼼한 교육내용이 소문이 나면서 한 달 만에 학생이 수십 명으로 늘었다. 수강생이 늘자 옥천군은 옛 노인회관을 무상으로 빌려줬다. 2007년 2월 강의실 4개와 실습실, 사무실 등을 갖춘 군(郡) 다목적회관으로 옮겨 한국어와 전통예절교육, 요리, 임신 및 출산관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옥천군에 살고 있는 258명의 결혼이주여성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 갔거나 다니고 있다.
옥천한국어학당의 장점은 촘촘한 네트워크. 전 대표는 “프로그램을 짜면 군청과 보건소, 농협 등 지역의 모든 기관과 전문가가 나서 자신들의 노하우를 직접 전해준다”며 “굳이 많은 예산을 들이지 않아도 효율적인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소문이 나면서 이곳을 벤치마킹하려는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2006년 로마 교황청에서 수녀들이 다녀갔으며 네팔과 스리랑카의 보건복지 관계자들, 일본 도쿄(東京)대 연구원 등 세계 각국의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국내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들의 견학도 이어지고 있다.
○ ‘경제자활’ ‘2세 교육’ 새로운 도약
옥천한국어학당은 한국어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제2의 도약과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요즘 신경을 가장 많이 쓰는 것은 ‘경제 자활’. 상당수 결혼이민자 가족들의 형편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6월 24일 ‘지구촌두레’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콩과 매실 등으로 매실청과 매실된장 등을 만들어 파는 자활공동체 사업단이다. 이와 함께 비즈공예 등 다양한 직업교육과 상설작업장을 마련해 소득 증진을 돕고 있다.
또 결혼이민자 2세들이 차별 없이 교육을 받고, 미래에 ‘어머니 나라’와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안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전 대표는 “결혼이민자 2세의 특성을 살려 한국의 공교육에서 누락되지 않고 국제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대표는 3일 옥천에서 창립한 ‘전국다문화가족지원센터협회’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전국 100개 결혼이민자지원센터 모임인 이 협회는 정부 부처 간 다원화된 결혼이민자 지원사업의 일원화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건강한 다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는 것이 옥천한국어학당과 전 대표의 희망이다.
옥천=장기우 기자 straw825@donga.com
▼“다문화지원센터 통해 친구랑 일자리 얻었어요”▼
“저 혼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며 한국생활을 배워왔는데 올 초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날아온 편지 한 통이 저의 생각을 바꿨습니다. 센터에서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고 열린 세상을 향해 도약할 수 있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한국인 사업가와 결혼해 6년 전 입국한 캄보디아 출신 라포마라 씨(27)는 “요즘 나의 하루는 빡빡하게 차 있다. 결혼 전 꿈꾸었던 바로 그런 모습”이라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통해 ‘119 외국인 통역 자원봉사’ 일자리를 얻었고 한국에 온 고국 여성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다.
라포마라 씨처럼 외국인의 한국생활 적응을 도와주기 위해 설립된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전국에 100곳이 있다. 한국어 교육, 가족상담, 취업·창업 지원이 중점 사업이다. 한국어 교육은 배우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첫걸음, 초급, 중급, 고급 4단계로 나뉜다. 결혼이민자가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한국사회에 대한 설명도 해준다. 결혼이민자의 인권보호와 권익증진에 관한 정보를 비롯해 한국문화의 이모저모에 대한 강의가 있다.
센터를 직접 찾아오기 힘든 사람에게는 지도사가 집으로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방문교육은 한국어 교육, 아동양육 지원, 출산 전후 지원 서비스로 이뤄진다. 올해는 지도사 2400명이 1만7000가구를 방문한다.
방문교사가 다문화가정 자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호응이 좋다. 다문화가정 2세들은 대개 어머니가 한국어에 서툴기 때문에 덩달아 한국어를 잘하지 못한다. 한국에 시집온 지 9년이 됐지만 아직 한국어에 서투른 필리핀 출신 마리테스 씨(34)는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딸이 한국말을 잘 못하는 엄마랑 답답하게 얘기하다가 한국말을 잘하는 선생님을 만나니까 무척 좋아한다”며 “나도 덕분에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 센터별로 결혼이민자 취업을 위한 이미지 메이킹, 자기소개서 작성 프로그램(경남 마산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이민자가 직접 인형극을 만들어 공연하는 프로그램(경북 구미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의 특화사업을 진행한다. 전국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대한 정보는 국번 없이 1577-5432에서 얻을 수 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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