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피해자 요구 없어도 삭제해야

  • 입력 2009년 4월 17일 02시 56분


대법 “명예훼손 게시물 방치 포털에 배상 책임”

○ 2월 개정 언론중재법

포털, 언론에 준하는 의무 정정보도-배상책임 명시

○ 포털업체들 당혹

“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구체적 기준 마련해줘야”

포털사이트도 명예훼손 게시물에 대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16일 대법원의 판결은 포털사이트가 지금처럼 언론사와 유사한 역할과 기능을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특히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삭제를 먼저 요구하지 않더라도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게시물을 알아서 차단해야 한다며 책임 범위를 넓혔다. 이번 판결에 따라 앞으로 포털 업체들의 운영 방식에 큰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신고 없어도 문제 글 삭제해야”=2005년 4월 “남자친구 김모 씨의 학대 때문에 딸이 자살했다”는 내용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김 씨는 포털사이트 블로그와 카페 게시판 등을 통해 ‘마녀사냥’을 당했다. 특히 이 같은 사실이 기사화되면서 김 씨에 대한 루머는 일파만파 확대 재생산됐고 댓글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1심 재판부는 “기사에 김 씨의 실명이 거론되지 않았지만 숨진 여자친구의 실명과 미니홈피 주소 등을 통해 가해자가 김 씨라는 게 드러났고 포털이 비방 댓글을 방치해 명예가 훼손되도록 한 책임이 있다”며 16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포털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도 “포털사이트는 언론사 기사의 배포와 편집 기능을 수행하고 통신사가 제공하는 기사를 배포하는 ‘유사 취재’ 기능을 지니고 있어 언론매체로 봐야 한다”며 배상 책임을 언론사에 상응한 수준으로 맞춰 배상액수를 3000만 원으로 올렸다.

대법원 전원재판부도 16일 이 같은 2심의 판단을 그대로 인정했다. 특히 “포털사이트는 인터넷 게시공간을 제공하면서 직간접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다”며 “이에 따라 피해자가 스스로 게시물을 삭제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더라도 명예훼손적 게시물에 대해서는 삭제하고 차단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다. 포털은 통상 피해자들의 신고가 있어야 비로소 비방 등 문제 소지가 있는 글을 삭제해 왔다.

그러나 자칫 이번 판결로 포털이 과도하게 게시물을 삭제해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크게 두가지의 기준을 제시했다. △불법성이 명백한 게시물로 타인의 법익 침해 가능성이 높을 때 △게시물이 포털업체가 기술적 경제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일정한 범위 내에 있을 때 등에 한해 포털이 삭제와 차단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로 “포털 측이 자체적 판단에 의해 기사를 선별 게재하는 것을 포기하고 검색 기능만을 제공하는 등의 방법으로 운영 방식을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의미를 해석했다.

▽“포털은 언론에 상응하는 책임 있다”=이번 판결에 앞서 올해 2월 국회를 통과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은 포털사이트 사업자에 대해 ‘언론’의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언론’과 동일한 정정 반론 배상 의무를 지게 해 사실상 ‘언론’의 대우를 하고 있다. 이 법은 포털 등 인터넷뉴스서비스를 ‘언론의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계속적으로 제공하는 전자간행물’이라고 규정해 기존 언론과는 다른 개념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5조 ‘언론피해구제의 원칙’ 조항에서는 포털은 언론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생명·자유·신체·건강·명예·사생활의 비밀 등에 관한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되며, 언론 등이 타인의 인격권을 침해한 경우에는 이 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피해를 신속하게 구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4조 정정보도, 16조 반론보도, 17조 추후보도, 18조 손해배상에 관련해서도 포털에 언론과 같은 의무를 지우고 있다.

▽포털 “명확한 기준 없어 역기능 우려”=포털사이트 운영 업체들은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기사와 댓글 관리 등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네이버를 운영하는 NHN 관계자는 “3년 전에 비해 모니터링 요원을 배 이상인 430명으로 늘렸고 기술적으로도 모니터링 시스템 체계가 강화했다”며 “그러나 명예훼손이나 비방용 게시글과 댓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판단할 근거가 여전히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다음과 야후 관계자들도 “이번 판결로 포털에 폭넓은 모니터링 의무가 부과된다면 선량한 이용자의 표현의 자유가 일부 제한될 수 있는 역기능도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 사건 발단

20대女 자살→포털에 “남자친구 때문에 억울한 죽음” 글 올라→남자친구, 포털상대 소송

명예훼손의 내용이 담긴 언론사 기사를 선별 게재한 것에 대해 포털 사이트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은 2005년 5월 한 20대 여성의 자살 사건에서 비롯됐다.

출판사에 근무하며 야간대학을 다니던 김모 씨(33)는 2004년 4월 친구의 소개로 서모 씨를 만나 1년쯤 사귀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임신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긴 김 씨는 서 씨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했고 이를 알게 된 서 씨의 어머니는 김 씨를 나무라며 뺨을 여러 차례 때렸다. 김 씨는 곧 서 씨 어머니를 경찰에 신고했고 합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서 씨 어머니는 충격받아 입원 치료까지 했다.

서 씨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김 씨에 대한 원망 때문에 2005년 4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는 “딸의 사연을 보고 억울한 죽음을 널리 알려 달라”며 서 씨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지난 1년간의 일들’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졌고 서 씨를 추모하는 카페까지 생겼다.

몇몇 언론사는 이를 기사화했고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사이트에 기사가 게재됐다. 누리꾼들은 김 씨에게 욕설을 퍼붓는 댓글을 올린 것은 물론이고 김 씨의 이름과 학교 등 개인 정보를 게시판에 올렸다. 충격을 받은 김 씨는 해명 기자회견을 열었고 포털사이트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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