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간다니 시집갈때보다 더 설레”

  • 입력 2009년 4월 20일 02시 57분


정약용 선생의 동상 앞에서 할머니 학생들이 포즈를 취했다. 환하게 미소를 짓고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진짜 초등학생과 다르지 않다. 최고령 김순덕 할머니(83·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는 사진을 찍거나 벤치가 보이면 제일 먼저 찾아가 앉았다. 남양주=홍진환 기자
정약용 선생의 동상 앞에서 할머니 학생들이 포즈를 취했다. 환하게 미소를 짓고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진짜 초등학생과 다르지 않다. 최고령 김순덕 할머니(83·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는 사진을 찍거나 벤치가 보이면 제일 먼저 찾아가 앉았다. 남양주=홍진환 기자
■서울 양원초등학교 1학년 할머니 340명 봄나들이

김순덕 학생은 날렵하게 올라탔다. 지난해 무릎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몸놀림이 빨랐다. 출발 예정보다 1시간 이른 오전 8시에 도착했는데 관광버스 안에는 친구들이 가득했다. “굿모닝!” 영어로 인사했더니 같은 반 친구가 “맛있는 거 많이 싸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이선재 교장 선생님(72)이 물었다. “여러분은 몇 살?” 학생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여덟 살!!!” “그럼 여덟 살답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오늘 즐거운 소풍되길 바랍니다.” “깔깔깔.” 웃음소리가 버스 안에 넘쳤다.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양원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가던 17일. 화창한 날씨 속에 400명 중 340명이 참가했다. 1학년이니까 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이다. 김순덕 학생은 5반. 버스가 움직이는 동안 옆 자리에, 앞뒤에 앉은 친구들과 쉬지 않고 수다를 늘어놓았다.

버스는 1시간 뒤 경기 남양주시 정약용 생가에 도착했다. “참새 짹짹, 오리 꽥꽥” 하며 일렬로 이동해 입구로 다가갔다. 성인 입장료는 1000원. 참가자 가운데 206명이 800원만 냈다. 65세 이상이어서 경로 할인 혜택을 받았다.

양원초등학교는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을 위한 학력인증 기관이다. 학생은 대부분 50∼70대. 김순덕 학생은 “손자 손녀들 소풍에는 많이 가봤지만 내 소풍에 가려니 시집올 때보다 더 설렌다”고 말했다. 생가를 한 바퀴 돌자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됐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도시락을 풀었다. 누군가가 싸온 복분자주가 한 순배 돌자 이야기보따리도 술술 풀렸다.

김순덕 학생은 83세로 이 학교 최고령이다.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2년 다녔지만 일본어만 배웠다. 일찍 시집가는 바람에 더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남편이 6·25전쟁 때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두 남매를 혼자 키웠다. 배우고 싶었지만 언감생심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성인에게 국어와 수학을 가르쳐준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입학했다.

같은 반 차연임 학생(71)은 1반 차희임 학생(64)과 자매다. 차연임 학생은 지난해 칠순 기념으로 6자매가 함께 일본 여행을 갔다. 출국신고서를 쓰는데 아무도 한자를 몰라 애를 먹었다. 차희임 학생은 “이제 노래방 가사도 읽을 수 있고 식당 메뉴판도 볼 수 있어요. 진작 학교 다닐 걸 그랬어요. 세상사는 게 너무 즐겁거든요”라고 말했다.

장진숙 선생님(52)은 “학생 중에는 부부도 두 커플 있다. 또 사돈이나 시누이와 올케가 함께 다니기도 하는데 창피하다며 노출을 꺼린다”고 귀띔했다. 보물찾기와 반 대항 장기자랑이 끝나고 버스는 오후 4시쯤 서울로 향했다. 도착할 무렵 담임인 고예곤 선생님(59)의 훈화가 이어졌다. “소풍 끝나고 집으로 곧장 가지 않는 분들이 있어요. 어머니가 안 오신다고 자녀들이 전화를 해요. 꼭 책가방 집에 가져다 놓고 놀러 나가세요. 20일에는 받아쓰기 시험이 있어요.”

양원초등학교는 4년과정(12학기)을 마쳐야 졸업이 가능하다. 수업은 하루 4시간. 등하교까지 생각하면 체력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김순덕 학생은 그래도 즐겁다. “가을에는 청와대로 소풍을 가고, 단양으로 1박 2일 수학여행도 간대요. 생각만 해도 신나요.” 얼굴에 주름이 졌지만 마음은 초등학생이었다.

남양주=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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