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 판사들 “엄중경고로는 미흡하다” 반발
“사퇴요구 부적절” 연판장 움직임에 신중론도
申대법관 “굴레-낙인 평생 짊어질 짐” 자책
○ “문제 있지만 물러나진 않는다”
이 대법원장은 3월 16일 법원 진상조사단의 결과 발표 이후 약 두 달 동안 공직자윤리위원회는 물론 법원 안팎의 의견을 수렴한 끝에 13일 신 대법관 사건에 대한 결론을 두 문장으로 짧게 요약 발표했다. 우선 신 대법관의 행위가 재판의 내용이나 진행에 관여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으로 규정했다. 이는 윤리위가 내린 판단과 같은 수준으로, ‘신 대법관이 재판에 관여한 것으로 볼 소지가 있다’는 진상조사단의 발표보다 완화된 결론이다. 다만 신 대법관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는 표현을 써 이번 사안을 가볍게 보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또 ‘신 대법관의 행동으로 법관들이 상처를 받고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손상됐다’고 밝혀 안으로는 법관들을 다독이고 밖으로는 국민에게 사과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일부 소장 판사들이 촉구했던 ‘징계위원회 회부’ 카드는 꺼내지 않았다. 윤리위의 결론처럼 신 대법관의 행위를 사법행정권 행사의 일환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징계 대상은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신 대법관은 이날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린 사과문을 통해 대법원장의 결정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번 사태로 사법부에 재판 간섭이 이뤄지고 있다는 오해의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법원에 크게 누를 끼쳤다”며 “이번에 얻게 된 굴레와 낙인은 일생동안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짐”이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사과의 뜻만 밝힌 채 뚜렷한 거취 표명이 없이 글을 마쳐 사실상 사퇴할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 소장 판사들 심상찮은 움직임
일부 소장 판사들과 법원 직원들은 내부 통신망에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를 보여달라”는 등의 댓글을 달아 사퇴를 거듭 촉구했다. 일부 법원에서는 단독 판사들을 중심으로 이번 사태를 다시 논의해야 한다며 전체 판사회의를 준비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 단독판사들은 전체 116명 중 85명이 단독판사회의 소집을 요구해 14일 오후 6시 반 대회의실에서 회의를 갖는다. 또 서울북부지법과, 부산지법 등 다른 법원에서도 소장 판사들을 중심으로 판사회의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판사회의에서 이 대법원장이나 신 대법관에 대해 강경한 결정들이 나올 경우 사법부 파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또 서울중앙지법의 일부 판사들은 대법원장의 ‘구두 경고’ 소식을 전해 듣고 점심식사 때 모여 신 대법관의 사퇴를 촉구하는 연판장을 만들어 돌리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한 판사는 “사퇴 촉구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어 좀 더 추이를 지켜본 뒤 연판장 문제를 다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판장은 이전의 사법 파동 때 판사들이 집단 의사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사용돼 사법 파동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 대법관의 사과 표명으로 동정론이 고개를 들고 있고, 연판장을 돌리는 문제도 쉽게 의견이 모아지지 않을 것으로 보여 이번 사태는 서울중앙지법 판사 회의의 결과에 따라 진정 또는 확산의 고비를 맞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 “사퇴 압력은 헌법에 위배”
법원 내에서 개혁 성향 법관으로 통하는 정진경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이날 내부 통신망 게시판에 글을 올려 “신 대법관의 행위가 부적절했다고 생각하지만 법관이 다른 법관의 사직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이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신 대법관의 행위가 파면에 해당하는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을 만한 행위가 아님은 대부분 판사들이 인정할 것”이라며 “설사 징계 절차가 이뤄지더라도 미미한 조치가 예상되기 때문에 징계는 단지 심리적 압박을 통해 사직을 유도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헌법상 신분이 보장된 법관에게 심리적 압력을 가해 사직시키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 행위를 했다고 비난하면서도 스스로 헌법에 위반된 방법을 동원하는 자기모순’이라는 것. 또 “이번 사건은 촛불재판을 둘러싼 정치적 사건에서 발단이 됐기 때문에 국민의 반은 법관의 집단행동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며 집단행동의 자제를 당부했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도 “대법원장이 절차에 따라 내린 결정을 법관 스스로 무시하고 신 대법관 사퇴를 종용한다면 국민이 법원의 판결에 어떻게 승복할 수 있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