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특별 수행원으로 간 소설가 황석영 씨(66·사진)가 인터뷰 등에서 한 발언을 둘러싸고 변절 시비를 비롯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황 씨는 13일 순방 중 인터뷰에서 “광주사태 같은 사건은 우리에게만 있는 줄 알았더니 영국도 있었고 프랑스도 있었고, 때가 되면 다 있는 거더라” “MB 정부는 중도 실용정부라고 본다” “민주노동당도 비정규직이나 외국인 근로자 문제까지는 못 나가고 그저 노조 정도에서 멈춰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14일 진보신당 홈페이지 게시판에 “황 씨가 2007년 대선 때 반MB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기억력이 2초라는 금붕어도 아니고 사람이 얼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어떻게 까맣게 잊을 수 있느냐”며 “이 정도 극적 변신이라면 욕할 가치도 없다”고 비난했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도 같은 날 라디오 불교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진보에서 하루아침에 뉴라이트로 전향 선언을 하는 행보”라며 변절 시비를 제기했다.
황 씨는 파문이 커지자 15일 한겨레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해명에 나섰다. 그는 ‘광주사태’ 발언과 관련해 “창피한 일이 서구에서도 있더라고 말한 것이다. 황석영이 어디로 가냐. 광주가 나이고, 나의 문학”이라며 “그 표현을 갖고 가치가 변했느냐는 것은 말꼬리 잡기”라고 말했다.
그는 MB 정부에 대해 “중도실용을 들고 나와 당선됐는데 촛불시위로 정신없었을 테고, 주위를 둘러싼 세력이 지난 10년과 반대방향으로 가니까 자기 생각을 관철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며 “그래서 우편향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유라시아 문화특임대사 등 정부 내 일정 역할과 관련해 “남북관계 개선은 정부와의 협력 없이는 성사될 수 없다”며 “내가 추진하는 알타이문화연합, 평화열차세계작가포럼에 대한 사전 설명이 없어서 갑자기 현 정부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쳐 오해를 산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민노당이 노조 수준이라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서는 “북한의 존재 앞에서 진보정당이 노동조합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고민들을 얘기한 것이다. 민노당이 섭섭하다고 한다면 ‘내 잘못이다. 믿어달라’고 하고 싶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보수 진영의 복거일 씨는 15일 P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좌파 정권에서 황석영 씨는 대우를 받은 사람이다. 이문열 씨같이 좌파 정권하에서 핍박받은 문인을 제쳐놓고 갑자기 황 씨를 데려가면 우파에 속한 시민은 어떻게 보겠느냐”고 말했다.
현재 황 씨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있는 상태다. 부인 김길화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황 씨를 대신해 “앞으로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김 씨는 “해야 할 말은 충분히 했으니 일일이 다시 나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는 독자의 몫이다. 기존 인터뷰 입장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며 황 씨의 입장을 전했다.
이문열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황 씨 문제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며 “다만 지금처럼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사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靑 “중도실용 맞긴 맞지만…” 좌우 비판에 속내 복잡▼
소설가 황석영 씨의 발언을 계기로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 코드’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청와대는 황 씨의 발언이 며칠째 논란을 빚고 있지만 별다른 공식 반응을 보이진 않고 있다.
이 대통령은 정권 출범과 함께 대북정책 및 외교 등에서 ‘이념’을 넘어선 ‘실용’을 강조해 왔다. 한때 ‘창조적 실용주의’라는 말도 유행했다. 이 대통령은 실제 이념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돼 있는 대북정책과 관련해 보수 진보 민족 등과 같은 이념적 가치를 앞세우기보다는 남과 북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정책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북한이 남한을 압박하고 미국하고만 직접 대화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데 대해 이 대통령이 평소 “결국 북한은 자기들 이익을 위해 우리와의 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짐짓 여유를 부리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청와대 관계자는 전했다.
최근 북한의 개성공단 폐쇄 위협 등으로 남북관계가 악화 일로에 있긴 하지만 이 대통령이 북한을 통한 러시아 천연가스 도입 사업 등에 관심을 보이며 “러시아 천연가스 도입 사업은 북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 대통령의 실용적 접근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물론 북한의 대남 적대시 정책으로 이 대통령의 실용적 대북정책이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또 다른 ‘이념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에선 이 대통령의 강경한 대북정책이 남북관계 경색만 초래했다고 비판하고 보수 진영에선 더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한다고 불만이다.
경제정책 기조를 놓고는 여권 내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특히 초선 의원들의 모임인 ‘민본 21’ 등이 “중산층과 서민들로부터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편향된 정책 기조를 바로잡고 민생본위의 정책에 더 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새 정부 출범 시 약속한 중도실용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 ‘보수적 가치’를 강조하는 측과 마찰을 빚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상황 탓인지 황 씨 발언 논란을 지켜보는 청와대의 속내는 꽤 복잡한 듯하다. 중도라는 가치는 좌우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샌드위치 신세다. 또 실용의 가치는 경제위기 등과 맞물려 아직 큰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취임 후 12차례 외국을 방문한 이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과의 만남 등에서 ‘실용 외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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