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 친구 묘소에 가야죠”
《“군사독재 시대 오욕의 역사가 남긴 뼈아픈 교훈을 가슴에 깊이 되새기며, 진실을 밝혀 내지 못했던 선배 법관들을 대신해 피고인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힙니다.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 및 면소(免訴)를 선고합니다.” 21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303호 법정. 45분간 이어진 서울고법 형사3부 이성호 부장판사의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29년간의 한이 서린 박수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환호도 탄성도 없었다. 김현칠 씨 등 피고인 5명은 물론 방청객들은 그저 눈물만 흘린 채 모두 일어나 한참 동안 박수를 그치지 못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2차례 대수술을 받은 김 씨는 선고 내내 온몸을 떨었다.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친구가 떠올랐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점철된 지난 29년간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있던 1980년. 김 씨는 충남 금산군에서 검찰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막 내디딘 27세의 청년이었다. 신군부 세력이 광주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던 그해 5월 21일 평소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 성경책 속에서 ‘전두환 광주살육작전’이란 문건을 발견했다. 김 씨는 문건 끝에 적힌 ‘군인들의 만행을 세상에 알려 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고교 동창 몇몇에게 이 문건을 복사해줬고 이것이 화근이 됐다.
고교 교사였던 한 친구가 학생들에게 이 문건을 바탕으로 광주항쟁을 얘기해줬고, 한 학생이 이를 교련교사에게 신고하면서 김 씨 친구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은 이들을 영장도 없이 충남도경 대공분실 지하실로 끌고 가 한 달 동안 온갖 고문과 가혹행위를 하며 용공사건으로 조작했다. 자신들이 짜놓은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 각본을 외우게 했고 북한 노래를 부르게 했다.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끼워 주리를 틀고 거꾸로 매단 채 코에 물을 부었다. 정신을 잃거나 잠이 들려고 할 때면 송곳으로 온몸을 찔렀다.
경찰은 이들에게 허위 자백을 받아냈고, 1981년 7월 김 씨 동창의 딸인 아람이의 백일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반국가단체인 ‘아람회’ 구성원으로 둔갑시켜 모두 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법정에서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럴 때마다 검찰은 재판이 끝난 뒤 따귀를 때리며 유치장에 불법 구금하기도 했다. 결국 법원은 진실을 외면했고 이들은 징역 4∼1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1988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2007년 7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아람회 사건이 조작됐다면서 국가에 사과 및 재심 조치를 권고했다. 다시 2년이 흘러 21일 재심 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이 부장판사는 29년간의 한 맺힌 역사를 94쪽에 이르는 판결문에 정리해 이를 요약하지 않고 모두 읽어 내려갔다. 판결문을 읽은 45분 동안 법정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눈물 훔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이 부장판사는 “교사, 검찰 공무원, 주부 등 평범한 시민이 국가기관의 불법구금을 법정에서 절규했음에도 당시 법관들은 이를 외면하고 진실을 밝혀 내지 못했다”며 “선배 법관을 대신해 사과하며 고인이 된 이재권 씨가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며 나머지 피해자도 평화와 행복을 찾기 바란다”고 위로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이재권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몇 차례 수술을 받다 1998년 세상을 떠났다. 김 씨는 이날 기자에게 고문에 몸부림치다 수갑에 살이 찢긴 팔목의 상처를 보여줬다. 그러고는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자리를 떠났다. “2차례 암 수술에다 12가지 합병증에 시달려 죽고 싶었지만 진실 규명을 위해 29년을 버텨왔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재권이 묘소에 이 판결문을 바치러 갑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