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회 무죄선고, 이념과 무관”

  • 입력 2009년 5월 28일 02시 59분


먼저 간 동료 앞에서 판결문 낭독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이 23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있는 피고인 중의 한 명이었던 고 이재권 씨의 묘소에서 무죄 판결문을 읽고 있다. 1980년 아람회 사건으로 구속됐던 조영건, 김현칠, 박해전 씨, 이재권 씨의 부인 박천희 씨, 한 사람 건너 정해숙 씨(오른쪽부터). 광주=연합뉴스
먼저 간 동료 앞에서 판결문 낭독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이 23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있는 피고인 중의 한 명이었던 고 이재권 씨의 묘소에서 무죄 판결문을 읽고 있다. 1980년 아람회 사건으로 구속됐던 조영건, 김현칠, 박해전 씨, 이재권 씨의 부인 박천희 씨, 한 사람 건너 정해숙 씨(오른쪽부터). 광주=연합뉴스
“사실 왜곡됐다면 바로잡아야”
재심서 사법부 과오 사과한 서울고법 이성호 부장판사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판단이 잘못됐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는 것이 맞습니다.”

서울고등법원 이성호 부장판사(52·사법시험 22회·사진)는 27일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려 한 평범한 시민들을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몰아 구속한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판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부장판사는 이번 판결 직후 자신을 ‘진보 판사’라고 분류한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나는 서울 강남에 살면서 종합부동산세도 내고 평소 성향도 보수 쪽에 가깝다”며 “하지만 사실에 대한 판단은 정권이나 이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부장판사는 21일 선고공판에서 이례적으로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들에게 사과한 데 대해 “잘못된 재판으로 피해를 본 사람에게는 사법부가 가해자이고, 나 역시 과거에 잘못된 판결을 내린 선배 법관과 연속선상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에게 옛 재판부나 경찰을 용서하라는 말을 넣지 않은 것도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이지, 가해자가 요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그 대신 피해자들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한다는 표현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이 부장판사는 특히 “피고인들이 과거 재판에서도 이번 재심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고문을 당했고 진실이 왜곡됐다고 밝혔는데도 재판부가 그 같은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들이 충남도경 분실로 불법 연행돼 장기간 고문을 당하면서 허위 자백을 했고, 사건이 검찰로 송치된 이후에도 경찰 수사관이 조사실에 입회해 진술을 번복하는지 감시하는 등 공정한 수사를 받지 못했는데도 재판부가 아무런 검증 없이 수사기관이 제출한 증거를 받아들인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 부장판사는 “아무리 보수적으로 봐도 평범한 시민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더라”고 말했다.

이 부장판사는 “결심공판 때 오후 9시가 넘도록 피해자들의 최후진술을 들어주려고 노력한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고 설명했다. 이번 재판은 과거 판결에 대해 단순히 잘못을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해원(解원)의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 아람회 사건 선고공판에서 45분에 걸쳐 판결문을 낭독한 것이나 딱딱한 문어체인 판결문을 구어체로 고치기 위해 선고 당일 오전 5시에 출근해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당시 법정에서는 이 부장판사의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피고인과 방청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

이 부장판사는 이미 진행 중인 다른 재심사건이나 재심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다른 과거 시국사건에 대해서도 “당사자가 원한다고 모든 사건을 다시 살펴볼 순 없겠지만 옥석(玉石)을 잘 가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람회 사건은 1981년 5월 검찰 공무원이던 김현칠 씨가 자신이 다니던 성당 신부의 성경책 속에서 발견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유인물을 복사해 친구들에게 돌린 것이 발단이 됐다. 같은 해 7월 신군부는 김 씨 동창의 딸인 아람이의 백일잔치에 모인 사람을 반국가단체인 ‘아람회’ 구성원으로 몰아 구속 기소했고, 김 씨 등 6명은 재판에서 징역 4∼1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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