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제 기관장’ 8년만에 퇴출 통지서… 낙하산 관행에 제동

  • 입력 2009년 6월 20일 02시 59분


19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이용걸 기획재정부 2차관(오른쪽)과 공공기관장 경영계획서 이행실적 평가단장인 이만우 고려대 교수(경제학)가 92개 공공기관장에 대한 경영평가 결과를 공동발표하고 있다. 과천=연합뉴스
19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이용걸 기획재정부 2차관(오른쪽)과 공공기관장 경영계획서 이행실적 평가단장인 이만우 고려대 교수(경제학)가 92개 공공기관장에 대한 경영평가 결과를 공동발표하고 있다. 과천=연합뉴스
대상자 22.8% 해임 건의-경고

공공기관서 상상하기 힘든 ‘사건’

평가결과 불복 후폭풍 올수도

“설마 했는데…. 정말 우리 기관장이 그만두게 되는 겁니까.” 19일 사상 처음으로 발표된 공공기관장에 대한 경영평가 결과에서 기관장 해임 건의라는 초강력 제재를 받은 4개 공공기관의 직원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철밥통’ ‘신이 내린 직장’으로 불리는 한국의 공공기관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대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관장이 경고를 받은 한 공공기관 임원은 앞으로 뒤숭숭해질 조직 내 분위기를 염려하면서도 “정치적인 연줄을 동원해 실력 없이 최고경영자(CEO)로 내려오는 ‘낙하산 관행’에 큰 변화가 올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평가 대상 92명 중 22.8%에 이르는 21명이 무더기로 해임 건의와 경고 조치를 받으면서 이에 따른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 개혁성 없는 기관장에게 ‘철퇴’

평가단은 기관별 ‘고유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지, 선진화 및 경영효율화 등 ‘공통과제’를 얼마나 완수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기관장들을 평가했다. 각각의 배점은 50점으로 100점 만점이다. 특히 공통과제의 평가 항목은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과 직결돼 있다.

정부는 기관장들의 평가 등급만 발표하고 실제 점수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진흥위원회 강한섭 위원장, 한국산재의료원 정효성 이사장, 한국소비자원 박명희 원장, 한국청소년수련원 김동흔 이사장 등 4명은 고유과제와 공통과제에서 모두 낮은 점수를 받아 퇴출 대상에 올랐다. 평가단 관계자는 “이들은 고유과제 점수도 낮았지만 공통과제의 점수가 더 나빴다. 공통과제 점수는 대체로 (50점 만점에) 20점 근처”라며 “특히 한국산재의료원은 고유, 공통과제 모두 최하위 쪽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날 평가 결과를 통보받은 기관장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규모가 비교적 큰 67개 기관장 중 유일하게 정원 감축을 완료하지 못했고, 노사관계가 나쁘다는 점이 악재로 작용했다. 강한섭 위원장은 “노사 갈등이 첨예한 데다 3월 계약직 재임용 심의 인사위원회에서 벌어진 폭력 관련 고소가 진행 중이어서 인력감축 등 조직개편을 계획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며 “낮은 평가를 피할 수 없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김동흔 이사장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 최우수 기관 및 기관장은 전무(全無)

대한주택공사 최재덕 사장과 한국토지공사 이종상 사장,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양휘부 사장 등 17명은 ‘옐로카드’에 해당하는 경고를 받았다. 1년 뒤 평가에서 한 번 더 경고를 받으면 관련 법령에 따라 자동적으로 해임 건의 대상이 된다.

주공 최 사장과 토공 이 사장은 공기업 개혁의 상징처럼 돼 있는 주공·토공 통합작업을 매끄럽게 풀어가지 못한 점 때문에 경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양 사장은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 온 민영 미디어렙(방송광고 판매대행사) 설립에 미온적 반응을 보여 낮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기관장들이 받은 점수는 전반적으로 높지 않았다. 최고 등급인 ‘아주 우수’(100점 만점에 90점 이상)를 받은 기관장은 한 명도 없었으며 ‘우수’(70점 이상∼90점 미만) 등급을 받은 기관장 24명의 점수도 70점대에 머물렀다.

상여금 지급의 기준이 되는 공공기관 평가결과도 마찬가지다. S, A, B, C, D, E 등 6등급으로 진행된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S를 받은 공공기관은 한 곳도 없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E를 받아 기관장 평가는 물론이고 기관 평가에서도 최하위 등급을 받는 불명예를 안았다.

○ 후폭풍도 만만찮을 듯

기획재정부는 이번 평가결과를 바탕으로 퇴출 대상인 4명에 대해 즉각 임명권자인 대통령이나 주무부처 장관에게 해임을 건의하기로 했다. 대통령의 공기업 개혁 의지가 강한 만큼 해당 기관장들이 조만간 해임될 것으로 재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평가 결과를 둘러싼 잡음도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낮은 평가를 받은 기관장 중 일부는 기관별로 사업내용, 환경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고유과제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다고 항변하고 있다. 규모가 비교적 작고 영향력이 크지 않은 ‘힘없는 기관’의 장들이 주로 타깃이 됐다는 불만이다.

공통과제 항목 역시 정부가 제시한 정책방향에 얼마나 순응했는지만 평가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 나온다. 한국산업기술재단은 기관 평가가 A인데 기관장은 경고조치를 받아 평가 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평가 결과에 불복하는 기관장의 경우 해임무효 또는 취소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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