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마음에 장애있는 제가 더 많이 배우죠”

  • 입력 2009년 6월 22일 02시 56분


‘10년 노숙생활’ 접고 장애인 자활시설서 희망 도전

“열심히 사는 장애인들 보며 지난 10년 무기력한 삶 반성”

서울시 노숙인 일자리 지원 33명 면접 통과 ‘제2의 인생’

1997년 봄, 박성철(가명·52) 씨는 20여 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나와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중국집을 열었다. 주변 공장들 덕분에 잘 운영되던 중국집은 외환위기로 공장들이 문을 닫자 매출이 뚝 떨어졌다. 게다가 박 씨는 배달을 가다 오토바이 사고를 내는 바람에 1억 원이 넘는 보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집을 처분했다. 2년 뒤에는 부인과도 이혼했다.

박 씨가 길거리에 나온 것도 이때부터다. 그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에 노숙인으로 10년의 세월을 허송했다”고 말했다. 노숙인 쉼터를 전전했고 돈이 필요하면 2, 3일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도 없었고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2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해 연락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던 박 씨가 8일 30여 년 만에 면접시험을 봤다. 노숙인 쉼터에서 일하는 봉사자들의 권유로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노숙인 일자리 갖기 사업’에 응시한 것이다. 면접을 통과한 박 씨는 장애인 자활 지원 일자리를 얻었다. 장애인들이 양말과 주방용 비닐봉투를 포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거들어주는 일을 하며 월 83만5000원을 받는다.

17일 일터인 서울 서초구 내곡동 다니엘직업재활원에서 만난 박 씨는 “마음의 장애인인 내가 오히려 이 친구들에게 많은 걸 배운다”며 “열심히 사는 장애인들을 보면 지난 10년의 세월을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냈는지 후회된다”고 털어놓았다.

노숙자 쉼터가 있는 관악구 신림동에서 내곡동까지 출퇴근에만 3시간이 걸리는 길이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다. 10일부터 일을 시작해 1주일간 용돈으로 2만5000원을 썼다고 했다. 담뱃값과 교통비 정도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목돈 1000만 원을 모으는 것이 꿈이다. 그는 “요즘 같은 세상에 1000만 원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진 목표”라며 “군 복무 중인 아들이 제대할 무렵이 되면 당당한 아버지로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다니엘직업재활원에는 박 씨 외에도 5명의 노숙인이 일을 하고 있다. 장애인에게는 소득 증대를, 노숙인에게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서울시가 시작한 노숙인 일자리 갖기 사업에는 노숙인 106명이 지원했고 이 중 33명이 면접을 통과했다. 이들은 다니엘직업재활원 외에도 ‘나자로의 집’ 등 12곳의 장애인 자활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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